허암(虛庵) 사적
정희량 순부(鄭希良淳夫)는 본디 수양(首陽 황해도 해주(海州)의 옛 이름) 사람이다. 높은 절개를 좋아하여 악인과 같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악인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박학다식하였으며, 특히 역수(易數)에 조예가 깊어서 음양의 운행을 궁구하여 점을 치고 변통하는 법술에 뛰어나 스스로 별호를 허암이라 하였다.
홍치(弘治) 8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의 시호)이 승하하자 7일 만에 성복(成服)하고서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대행왕(大行王)을 위해서 하는 불사(佛事)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한 것이 지나치다 하여 서해(西海 황해도 해주의 다른 이름)로 귀양 갔다가 얼마 후에 석방되었고, 그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당시에 문학으로 명망이 있었다. 한원(翰苑)에 있을 때는 금중(禁中)의 일을 힘껏 간언하였다. 이듬해 무오년(1498, 연산군4)에 여러 번 승진되어 봉교(奉敎)에 이르렀으니 매우 후한 총애를 받은 것이다.
가을에 사화(史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은 선왕(先王)을 비방했다 하여 부도죄(不道罪)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ㆍ이목(李穆)ㆍ허반(許磐)은 악인과 한패가 되어 선왕을 폄하했다 하여 대역죄(大逆罪)로 기시형(棄市刑)에 처했으며, 강겸(姜謙)은 장(杖) 100에 변읍(邊邑)의 종으로 삼고 그 가산을 적몰하고, 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澣)ㆍ정여창(鄭汝昌)과 공자(公子) 이총(李摠)은 난언죄(亂言罪)로,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ㆍ정승조(鄭承祖)는 불고간죄(不告奸罪)로 모두 장 100에 유(流) 3000리에 처했으며, 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胄)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煕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은 김종직의 제자로 국정을 비방했다 하여 각각 장 80에 처하고 모두 변읍에 부처(付處)하여 봉화간(烽火干)이나 정로간(庭爐干)으로 삼았다.
정희량은 처음에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김해(金海)로 양이(量移)되었는데, 1년 뒤에 어머니가 작고하였다. 가을에 요얼(妖孽)이 있다는 것 때문에 죄수들을 관대히 석방하였는데 그때 풀려나 덕수(德水)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늘 탄식하기를 “갑자의 화는 무오보다 심할 것이다.”라고 하더니 하루아침에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처음 집에서 추적하여 조강(祖江)의 모래밭에서 그가 남긴 두건ㆍ신발ㆍ지팡이만을 찾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겼다. 5월 5일이었으며 나이는 34세로 자식이 없었다. 아내가 그가 남긴 의복을 매장하고 사라진 날을 기일로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강정왕 때 연산(燕山)의 모비(母妃)가 사사(賜死)되어 죽었는데 연산은 즉위하자 이것을 속으로 원망하였다. 신수영(愼守英)이란 자는 왕후(王后 연산군의 비 신씨(愼氏))의 동생으로 총애를 받아 권세가 있었는데, ‘익명서(匿名書)로 조정을 비방한 것은 죄지은 자들이 불평과 원망을 한 것’이라고 고변하여 드디어 갑자사화가 있게 되었다. 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한명회(韓明澮)ㆍ정창손(鄭昌孫)ㆍ어세겸(魚世謙)ㆍ심회(沈澮)ㆍ이파(李坡)ㆍ김승경(金升卿)ㆍ이세좌(李世佐)ㆍ권주(權柱)ㆍ이극균(李克均)ㆍ성준(成俊)이 모비를 폐한 일에 연루되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고, 한치형ㆍ윤필상ㆍ이극균ㆍ이파ㆍ성준은 그 집안까지 멸족되었다. 홍귀달(洪貴達), 권달수(權達手), 이유녕(李幼寧),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藩), 공자(公子) 이심원(李深源),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최부(崔溥), 성중엄(成仲淹), 박은(朴誾), 이원(李黿), 김굉필(金宏弼), 신징(申澄), 심순문(沈順門), 강형(姜詗), 김천령(金千齡), 정인인(鄭麟仁), 이주(李胄), 조지서(趙之瑞), 정성근(鄭誠謹), 정여창(鄭汝昌)은 혹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혹은 대담하게 간언했다는 이유로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미 죽은 자는 모두 부관참시 당하였고 친척이 모두 연좌되어 죽기도 하였다. 2년 뒤에 연산이 폐위되자 대대적으로 죄수를 석방하여 연좌된 자들이 모두 풀려났고, 김종직 이하 모든 사람이 복관(復官)되었다.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 연호) 연간에 도수(陶叟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이 소백산(小白山)에서 《주역(周易)》을 읽는데, 한 노승이 구두(句讀)를 정정해 주는 것이 매우 정확했다. 선생은 그가 허암일 것이라고 의심하여, “스님께선 《주역》을 아십니까?” 물으니,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스님은 정허암(鄭虛庵)을 아십니까?” 하니, “허암이 누구입니까?” 하였다. 선생이 허암에 대해 일러 주자, “그렇군요. 예전에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서 어떤 사람인지 좀 압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세상이 바뀌어 금령(禁令)도 풀렸는데, 허암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사라져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삼년상을 다 치르지 않았으니 불효이며, 군주를 섬기다가 군주의 명을 저버렸으니 불충입니다. 어찌 불충불효한 자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속으로 허암이라 생각하여 후한 예우를 하려고 하자 노승이 일어나 떠났는데 간 곳은 알지 못했다 한다.
이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기록을 보니, 허암의 일이 실려 있는데 역시 이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그의 마음과 사적을 살펴보니 눈물이 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옛날에 말하는 ‘청사(淸士)’이다. 세상의 변고를 만나 세상을 피하여 종적을 감추고서 종신토록 후회하지 않았다. 특히 그의 행적은 확연히 더욱 남다르다. 남긴 글이 세상에 전하는데, 청고(淸苦)하여 속세를 끊더니 그 글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D001] 홍치(弘治) …… 뽑혔다 :
정희량(鄭希良)이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한 것은 홍치 5년인 1492년(성종23)이고, 홍치 8년인 1495년(연산군1)에는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본문에 홍치 8년이라고 한 것은 홍치 5년의 오기인 듯하다. 《成宗實錄 23年 4月 5日》 《文科榜目》
[주-D002] 태학(太學)의 …… 언급하였는데 :
나라에서 성종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올리자 성균관 생원이었던 정희량ㆍ조유형(趙有亨)ㆍ이자화(李自華) 등이 상소하여 선왕에게 불효한 것이라고 하며 재를 올리는 것을 찬성한 좌의정 노사신(盧思愼)을 비난하였다. 《燕山君日記 卽位年 12月 29日, 1年 1月 4日》
[주-D003] 한원(翰苑)에 …… 간언하였다 :
한원은 예문관(藝文館)의 별칭이다. 정희량은 1497년(연산군3) 예문관 대교가 되어,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간언을 받아들일 것,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대신을 공경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를 올렸다. 《燕山君日記 3年 7月 11日》
[주-D004] 가을에 사화(史禍)가 일어나서 :
사화는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말한다. 유자광(柳子光)ㆍ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김일손ㆍ권오복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춘추관 기사관이었던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하여 일어났다.
[주-D005] 부처(付處) :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준말로, 유배(流配)에 처한 죄인에게 그 정상을 너그럽게 참작하여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에 한 곳을 정하여 지내게 하는 처벌이다.
[주-D006] 봉화간(烽火干) :
봉수(烽燧)에서 후망(堠望)을 하거나 봉홧불을 올리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신양역천(身良役賤)이 주로 이 일에 종사했으나, 중앙에서 죄를 짓고 외방(外方)에 귀양 간 자에게 강제로 맡기기도 하였다. 봉군(烽軍)ㆍ봉수군(烽燧軍)ㆍ봉화군(烽火軍)ㆍ간망인(看望人)ㆍ후망인(堠望人) 등으로도 불린다.
[주-D007] 정로간(庭爐干) :
관아의 뜰에서 불을 피우거나 횃불을 밝히는 일에 종사하는 하례(下隷)인데, 정료부(庭燎夫) 또는 노간(爐干) 등으로도 불린다.
[주-D008]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나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는 것이다.
[주-D009] 갑자의 화 :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말한다. 연산군이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한 사람들과 폐위 사건에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성종의 후궁들과 왕자들을 죽였으며 또 이를 빌미로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들과 사림들을 제거하려 획책하였으므로 더욱 확대되어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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