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의 편지[석한남의 붓길따라 사연따라]
‘저는 부모님 모시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만, 굶어 죽은 시체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차 살아남는 사람이 없게 생겼으니, 더 말씀드려 무엇 하겠습니까./ 매일같이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목에 바늘이 걸린 것만 같습니다.’(此中奉老菫遣 而餓莩相連/ 將無孑遺 謂之何哉 /日日對食 比於中鉤)
1671년 2월 13일 남구만(1629∼1711)은 아저씨뻘 되는 어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경술년(1670)부터 기상이변에 전염병까지 겹치며 조선 백성들은 전대미문의 대기근을 겪었다. 신해년(1671)까지 이어진 이 재앙을 역사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 전역에서 100만 명에 가까운 백성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나갔다.
특히, 1670년의 대기근은 호남과 충청 일대가 가장 참혹했다. 이 무렵 남구만은 청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듬해 함경도에서는 메뚜기 떼가 출몰해 구황작물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바람에 그 피해 규모는 말로 다 할 수도 없었다. 당시 남구만은 함경도관찰사였다.
남구만은 두 해에 걸친 대재앙의 참상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먹는 것이 부끄러웠고, 음식이 차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남구만은 이 참상을 낱낱이 조정에 아뢰어 구휼을 청하는 한편, 현지에서는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이 혹독한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근면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신념은 이 시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이후 중앙 정계로 복귀한 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환국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제학을 비롯해 형조·병조판서에 이어, 마침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1707년 78세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명예직)가 됐다.
고문헌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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