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1913년名人號譜(성호보휘) 霤岸韓磌有文集과 1925년朝鮮人物號譜全貳冊 霤岸有文集(문집이 있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현재는
찾지를 못하고 있음) 그런데 참의공 선조 할아버지는 천수 를 누리지 못하시고 39세를 일기로 너무 일찍이 졸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7
형제 아드님들 께서 훌륭하게 관직에 등용하게 하였다. 이에 할아버지의 형님이신 좌상 (左相) 한확(韓確)의 힘이 컸다고 전하여진다.
◉고양 내유리 대내산
고양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1413년(태종 13) 고봉현과 덕양현德陽縣을 합쳐 高陽縣이 되면서부터이다. 조선조 전기부터 고양동으로 고양군청이 이전되기
전까지 이곳 마을에 고양군청과 객사가 있어 외지에서 온 관원들이 머무는 객관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고읍마을 국사봉 아래에 가면 당시
군청 터가 남아 있다.
◾내산촌(奈山村)내유동을 이루는 마을 로 통일로에서 명봉산 동쪽에 위치한 자연촌락의 동네이다.
내유동은 조선조 영조년간에 발간된 고양군지 등의 기록에도 보이는 오래된 마을이다. 당시의 기록에는 내산리(柰山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내동촌(內洞村)과 계
기동(鷄基洞)마을이 있고 모두 102(戶)가 있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 村落중 우리 叅議公派선조님의 後繼 6위 세거 하셨던 고향이다.
옛 구전(舊傳)으로 전하는 이야기속 에는 시칭낙하명유(時稱洛下名儒)로 알려진 선조사부(宣祖師傅)韓胤明 선조께서 선산 건너편 마을에 경모사(景慕祠)배움의
학당을 세워 지내셨던곳 이기도 하다.
고양군(高陽郡)내산촌(萊山村)에서 시묘(侍墓)조상 무덤을 지키고 살았는데, 내산동이란 이름은 오래전부터 마을에 능금(奈)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선
조의 고향에는 밭과 논에서 쉽게 볼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유산촌(遊山村)놀미 유산마을은 내산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한 자연촌락 으로 일명 놀미로 부르기도 하였다. 유산촌은 명봉산 아래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 마
을이 었는데 본래 유산을 놀뫼라고 부르다가 놀미가 되었다 한다. 그후 1911년 조선기록지지 기록에는 이 지역을 내유산리(奈遊山里)로 표기 했다. 내유리는 이
후 행정구역을 개편 내산리의 내(柰)자와 유산리(遊山里)의 유(遊)자를 따서 내유리가 되었다가 후에 오늘날 내유동이 되었다.
◾명묘골 유명한 분이 묻힌 묘가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유명한 인물이 묻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조선영조년에 발간된(高陽郡邑誌)全
고양지역에도 왕실 묘역이 많이 위치하여 왕실 가족, 후손들이 묘역 인근에 궁방전宮房田과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집단으로 살게 된 경우도 많았다.
①임금이 공신전(功臣田)이나 사전(賜田)을 내릴 때 녹권(錄券) •교서(敎書) 등과 함께 사여(賜與)의 대상을 기록하여 내리는 지패(紙牌).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현재 관산동은 관(官)자를 쓰고 있다. 이곳을 관산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조 전기부터 고양동으로 고양군청이 이전되기 전까지 이곳 마을에 고양군청과 객사가
있어 외지에서 온 관원들이 머무는 객관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은 철마산과 명봉산의 능선이 남북으로 이어져 파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은 공릉천이 북쪽으로 흐른다. 공릉천 충적지는 넓은 평야를 이루어 농업이 활
발하다.
대자동은 내유동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인구밀도가 낮고 산이 많으며 자연촌락이 많은 마을이다
내유동(奈遊洞)이라는 지명은 내산(奈山)과 유산(遊山)을 합쳐 내유리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곳에 全羅監司를 지낸 한전(韓磌:1408년~1447) 墓 와 嫡子 전라병마절도사 한충인(韓忠仁:1426~1504)墓. 永眠하여 계신곳이다.
▪15세 韓訓1444년 甲子生. 16세 韓鯤1496년 丙辰生. 17세 韓胤明1526년 丙戌生. 18세 韓惟省1550년 推定. 선조의 墓가 潛寐(잠매)하여 계시다.
그리고 참의공 한전(韓磌:1408년~1447)의 여섯째 아드님 이신 한충상(韓忠常)1444년推定세종26년 할아버지의 墓 先塋下 下兆 永逝(영서)하여 계시다.-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