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땅 이곳 내유리에서 참의공 선조께서 유년시절을 보내셨고, 고려조 恭愍王弑害事件에 선계의 피화도 있었지만 한녕(諱寧)의 아들이신 한영정(韓永矴1386推定) 祖考께서 이땅에 살 수없음을 아시고 外祖父(權仲和1322~1408)의 도움으로 明나라 에 亡命하시었다가 따님 두 분이 明太宗麗妃로 選入되시고 宣宗皇帝의 恭愼夫人으로 選入되시어 西城府院君에 冊封되어 錦衣還鄕하니 나라에서 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에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를 命하였고, 조선 태종때 조선 초기 무신으로 활동했던 장인(丈人)김영렬(金英烈1370~1404)인물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해 1401년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됐고 친이방원의 정치적 입장에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 중앙의 삼군부에서 실제 병력동원을 관장했다.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김영렬은 좌명공신으로 확고한 명성과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원이 복원 되면서부터 父親 韓永矴(朝鮮朝 中訓大夫 淳昌郡事)엮임 하셨고, 이곳 내유리를 食邑(옛날에, 국가(國家)에서 특(特)히 공신(功臣)에게 내리어 지내셨으며) 세종 1년 1월 17일 임술 8번째기사 1419년 한확(韓確)의 아우 한전(韓磌)으로 의영고 승(義盈庫丞)을 삼고, 호조에 명하여 7품관에 해당한 녹(祿)을 특사하였다. 蔭職(음직)으로 官 에 나가신걸 보아 그후 부터는 한양(漢陽)에 거주 하신걸로 보여진다.
◾경기도 고양은 14세 한충인(韓忠仁)선조의 妻家 丈人김중엄(金仲淹:安東金氏)의 세거지(木稀島:목희도)이다.
옛지명을 통하여 알아본바 松峴里(솔개)와 木稀里(나무드머리)가 합하여 지금의 元興里이며, 木稀島(나무드머리마을)라 하여 청자를 굽던 마을에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써서 나무가 드물다해서 부른 마을 이다. 고양군지에 조선시대로 부터 목희리로 표기 되어 있다.
연산군10년(1504년)4월 고양군의 혁파 문제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연산10 甲子士禍 1504년 6월4일 부관능지(剖棺凌遲)하고 적몰하며,아비 및 동생은 장(杖) 1백에 처하여 외방(外方)으로 내쫓으라. 그후 1505년燕山11년9월19일 할아비 및 아재비·조카는 비록 죽었더라도 모두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이 일은 율문(律文)에 없는 형벌로 다스린다.(甲子禍籍기록子女와 그 동족까지 연좌되었다.)
하여 家門의 避禍를 받았으며, 8월에는 고양을수렵장으로 만들어 금표(禁標)를 세우고 군의 창고 곡식을 파주로옮겼다. 또한 연산군 11년 7월에는 금표지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연산군 말엽의 고양군 혁파 사건은 고양 지역에 일체의 주민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관청, 가문, 가옥들을 텅텅 비게 만들었다.
또한 사패지로 하사받은 토지나 능침지는 관리할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되었고 관청의 관사는 모든 역사적 기록이 분실되어 실질적으로 고양군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고양을 떠난 주민들은 황폐화된 고양 땅으로의 복귀를 외면하였다. 이미 허물어진 집과 황폐화된 토지, 도축되어 버린 가축은 중종반정 이
후 군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전까지 완전히복구되지 못했다.
이러한 황폐함은 중종반정에 의해 일부 복구되기는 하나,1498년戊午史禍 昭陵復位 15세(韓訓)할아버지의 죽음과 1504년甲子士禍 廢妃尹氏事件 14세(韓忠仁)할아버지의 사망후 목희도에서 내유동으로 移葬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중종1년(1506년9월20일) 전조(前朝:연산군)에서 무고하게 죄를 입은 자 홍문관. 대간으로서 죽음을 당한 자들은 모두 곧은 말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 사람들을 모두 추증하여 작위를 주되,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통정(通政)이나 가선(嘉善)을 주고 그 자손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녹용(錄用)하소서 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고(師古), 아명은 학이(學而),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증조부는 군사(郡事) 한영정(韓永矴), 조부는 참의 한전(韓磌), 부친은 수군절도사 한충인(韓忠仁)이며, 모친은 돈녕부 승(敦寧府氶)김중엄(金仲淹)의 딸이다.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의 처남이다.
1486년 식년시에 생원·진사 양시(兩試)를 거쳐, 1494년(성종25) 문과에서 장원을 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수찬·소격서령을 지냈다.
1498년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의 묘제의(廟制議)를 송나라 인종의 고사(故事)에 따라 백세불천지주(百世不遷之主)로 할 것을 기초(起草)한 사건에 연루되어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