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譜圖〕
한씨의 선조는 기자(箕子)에서 나왔다. 한원왕(韓元王)에 이르러 세 아들을 두었으니,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덕양(德陽) 기(奇)씨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한
(韓)씨가 되었다. 세대가 멀어지고 족보가 일실되어 전해오는 계통이 상세하지 않은데, 태위공 이후부터 비로소 족보에 보이므로 청주(淸州)에 본관을 두었다.
위양공(威襄公) 부군(府君)은 처음 청주 방정리(方井里)에 살았다. 농사에 밝아 곡식을 축적하였고 시세를 따라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렸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가는 길이 집 앞으로 나 있었는데, 공께서 검을 잡고 나가서 맞이하여 저장해둔 양식을 풀어 군사를 대접하였다. 마침내 뒤를 따라
헌신하여 통일의 공훈을 도와 이루어 철권(鐵券)을 수여받았고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계책과 정책은 비록 징험할 문헌이 없지만, 참으로 위대한 재주와 웅대한 지략을 품고 밭이랑 사이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은 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우리 한씨는 거의 온 나라에 퍼져 있지만 위양공을 비조로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참으로 덕과 인을 쌓아 근원이 깊고 뿌리가 굳건한 분이 아니라면 또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방정리에 무농정(務農亭)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공이 남긴 터전이다. 후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謙)이 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었고, 묘는 가산(駕山)에 있었으나 중세에 실전되었다. 숙종 기사년(1749) 종족에서 관에 소송을 내어 조정에서 경조랑(京兆郞)을 파견하여 묏자리를 파보고 신표를 얻었다. 또 우물을 수리하다가 깨진 비갈(碑碣)이 나와 비로소 노(盧)ㆍ이(李) 두 성씨가 함부로 점거한 것
임을 알게 되었는데, 자획이 완연히 징험할 만하여 드디어 비갈을 세우고 묘지(墓誌)를 묻고서 제수용 밭과 묘지기를 두었으니 올해까지 제향이 끊이지 않는다. 그 사실은 후손 영상(領相) 익모(翼謩)가 지은 비문에 자세하다.
◎준겸(浚謙)
한준겸(韓浚謙, 1557~1627)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ㆍ한성부 판윤ㆍ평안도 관찰사ㆍ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에 책봉되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익모(翼謩)
한익모(韓翼謩, 1703~1781)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33년 문과에 급제하여 1772년 영의정에 올랐다. 정조 즉위 후 홍인한(洪麟漢)을 국문할 때 불참한 죄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풀려난 후 은거하였다.
사숙공(思肅公) 부군은 충선왕(忠宣王)ㆍ충숙왕(忠肅王)ㆍ충혜왕(忠惠王) 세 임금을 대대로 섬겼다. 일찍이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이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엿보면서 갖은 참소를 다 하였으나 공이 뛰어난 계책으로 왕을 화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 큰 공훈 때문에 철권(鐵券)을 하사받고 벽에 초상이 그려졌다. 《고려사(高麗史)》본전(本傳)에 이르기를, “공은 부지런하고 신중하며 도량과 재능이 있었으며 매사에 세 번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충혜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서원군(西原君)한방신 부군은 문재(文才)와 무용(武勇)을 겸비하여, 고려 말에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고 왕성을 수복했으며, 또 여진족을 격파하고 김삼선(金三善)ㆍ김삼개(金三介)의 난을 평정하여 화주(和州 영흥)ㆍ함주(咸州 함흥) 등의 주를 다 수복하여 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후한 상을 하사받았다. 《고려사》에 열전이 있으니 살펴보아 알 수 있다. 공민왕 갑인년(1374)에 자제위
(子弟衛) 홍륜(洪倫)이 시해와 역모 사건 때문에 주살되었는데, 사건이 자제위에 연루되어 공의 둘째 아들 안(安)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공이 이 사건에 연좌되어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고, 녹사공(錄事公)한녕과 함께 화를 입었다.
순창(淳昌)한영정(韓永矴) 부군의 사적은 결락되었다.
양절공(襄節公)한확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돈후하고 질박하며 재주와 지략이 성대하게 드러났는데 명나라 황제가 광록경을 선수(宣授)한 제책(制策)에 이미 보인다. 현천(俔天) 자매가 황제의 수도로 시집을 갔을 때 나이가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았는데 칙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세종을 책봉하였다.
이윽고 본조(本朝 조선)에서 정권을 잡아 다시 충훈부(忠勳府)에 올랐고, 성녀(聖女)를 낳아서 기르시어 종묘를 인도하고 보우하였다. 공적과 명성은 두 나라에 드러났고 공훈과 덕은 백 대에 드리웠으니 아아!
훌륭하도다. 비록 그렇더라도 을해년 공훈은 군자들이 얘기하기 부끄러워한다. 공의 일 가운데 신고령(申高靈)ㆍ한상당(韓上黨)과 다른 것은 국승(國乘 국사)에서 징험할 수 있다. 특히 왕실의 외척이라 지위가 높고 가까웠기 때문에 일개 선비처럼 고상하게 처신하는 것은 형편상 불가능한 점이 있었다. 후세에 옛날 일을 논하는 자들이 공의 자취를 생각하면 공의 마음을 거의 밝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로,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ㆍ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계유정난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다.
◎한상당(韓上黨)
한명회(韓明澮, 1415~1487)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ㆍ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즉위시키는 데 힘썼고, 단종의 복위 운동을 제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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