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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EJOUNG!(매화---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 한충상)

관리자 2025.11.27 16:54 조회 수 : 2

(조선왕조실록 한충상)

 

세조 14년무자(1468성화4년)/05/16(을해) / 장귀동이 살인한 것을 용서하게 하다

御序賢亭(어서현정) :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召承旨等視事(소승지등시사) : 승지(承旨) 등을 불러 정사를 보았다.

部將韓忠常(부장한충상) : 부장(部將) 한충상(韓忠常)이

嘗率正兵張貴同(상솔정병장귀동) : 일찍이 정병(正兵) 장귀동(張貴同)·

安元(안원) : 안원(安元)·

全元等(전원등) : 전원(全元) 등을 거느리고

捕盜於城外(포도어성외) : 성(城) 밖에서 도적을 잡았었는데,

貴同等打殺結城京邸吏魯生之妻(귀동등타살결성경저리로생지처) : 장귀동 등이 결성 경저리(結城京

邸吏)* 노생(魯生)의 아내를 타살(打殺)하였으므로,

刑曹啓曰(형조계왈) :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貴同律應絞(귀동률응교) : “장귀동은 율(律)이 교형(絞刑)에,

忠常等杖一百流三千里(충상등장일백류삼천리) : 한충상 등은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해당합니다.”하니,

上謂同副承旨韓繼純曰(상위동부승지한계순왈) : 임금이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이르기를,

人之致死(인지치사) : “사람을 치사(致死)케 한 것이

不應若是易也(불응약시역야) : 이와 같이 쉽게 응해질 수가 없다.

當初漢城府(당초한성부) : 당초에 한성부(漢城府)는

因屍凍(인시동) : 얼어 죽은 시체를 검

檢視不詳(검시불상) : 시(檢視)함에 자상하지 못한 때문이고,

今則日月已久(금즉일월이구) : 이제는 일월이 이미 오래되어

亦難詳辨(역난상변) : 또한 자상하게 분별하기가 어려운데,

又經赦宥(우경사유) : 또 사유(赦宥)를 경과하였으니

竝皆原之(병개원지) : 아울러 모두 용서하게 하라.”하였다.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경저리(結城京邸吏) : 고려와 조선조 때 지방 관청과 중앙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게 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서울에 파견하던 향리(鄕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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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將:

 

오위의 부장은 정원이 25인으로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 등으로 별칭되었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에서 각 부(部)를 통솔하던 종육품(從六品) 서반 무관직으로 정원은 25원이다. 오위는 의흥·용양·호분·충좌·충무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중·좌·우·전·후부 등 5부씩 두고, 각 위를 맡은 위장(衛將) 밑에 각 부를 맡은 부장이 5명씩 배치되어 있어 총 25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로 사과(司果: 正六品)가 있고, 아래로 부사과(副司果: 從六品), 사정(司正: 正七品)이 있었다. 참상(參上)이 10원, 참하(參下)가 14원, 음참하(蔭參下)가 1인인데, 참하와 음참하는 재직 20개월이면 출육(出六)하였다. 부장은 宣傳官 진무(鎭撫)와 함께 서반청(西班廳) 요직으로 꼽혀, 이들에게는 그 아들에게 음서(蔭舒)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부장들은 시가(試可)를 거쳐 수령 등에 제수되었다.

文武官職자의 淸要職은 양반중에서도 제일의 문벌이 좋은 집안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는 양반의 핵심 관직이었다.

 

正兵:

 

육군에 종사하는 양인 농민의 의무군역을 정병이라고 부른 것은 1459년(세조 5)의 병제개편 때 부터였다....정병에 속하는 신분층은 양인 농민 가운데 상층부에 위치하였다. 세조 때 군액확장책 (軍額擴張策)에 따라 현직(顯職 : 높거나 고귀한 관직)을 거친 관리 신분층이 대부분 정병으로 뽑혀서 배정되었던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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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漂海錄) 제3권에 한 충상 선조님 행적)

 

무신년(1488, 성종 19) 4월27일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 사신(謝恩使臣)을 만났음.

 

치소의 서북 모퉁이에 장감(張堪 후한 광무제 때 사람)의 사당이 있었으니, 장감이 어양 태수(漁陽太守)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에게 씨 뿌리고 나무 심는 것을 가르쳤더니 동요(童謠)에, ‘보리 이삭이 두 가닥이 졌다. ……’고 했다 합니다. 장감이 떠난 뒤에 그를 사모하여 사당을 세웠는데,새로 세운 것과 같았습니다. 신 등이 길을 떠나려고 하니 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조선국 사신이 왔습니다.’ 하므로, 신은 장술조에게 말하기를,

“우리 본국 사신이 곧 온다지요. 만약 노상에서 서로 만난다면 한번 읍(揖)만 해도 좋으니, 나는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본국 고향 소식을 알고 싶소.”하니, 장술조는 말하기를,“좋습니다.”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경에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한충상의 매형),서장관(書狀官) 윤장(尹璋)과 최자준(崔自俊)ㆍ우웅(禹雄)ㆍ성중온(成仲溫)ㆍ김맹경(金孟敬)ㆍ장우기(張佑奇)ㆍ한충상(韓忠常)ㆍ한근(韓謹----한충인의 둘째 아들)ㆍ오근위(吳近位)ㆍ김경희(金敬?)ㆍ권희지(權?止)ㆍ성후생(成後生)ㆍ이의산(李義山)ㆍ박선(朴璇)ㆍ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

(漁陽驛) 안에 우거하였으므로,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마당 가운데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또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 말하기를,

正使성건은 1438년생으로 중국사신으로 갔을 때 나이는 대략50세, 한충상 선조님의 나이는 대략 45세정도 된다. 매형인 성건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는 성건의 자제군관으로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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