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046 08/10/03 (임인) 001 / 영의정 한치형의 졸기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이 죽었다.
그의 자(字)는 통지(通之)요. 소혜 왕후(昭惠王后)3626) 의 사촌 오라버니다. 약관(弱冠) 때 혜장 대왕(惠莊大王) 께서 불러 보고 군직(軍職)에 임명하였고, 여러번 전직(轉職)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장령(掌令)·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성화(成化) 3년 에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좌승지로 전임(轉任)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무자년 에 함길도(咸吉道) 관찰사에 임명되고, 돌아와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신묘년 에 좌리 공신(佐理功臣)으로 책록(策錄)되고 잠시 후에 형조 판서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차례 호조 판서·병조 판서로 전임되었다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다. 병진년3633) 에 우의정에 승진하고 전임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가 69세다. 시호(諡號)는 질경(質景)이니,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어서[忠正無邪] 질(質)이라 했고 의리에 의하여 성사하여서 [由義而濟] 경(景)이라 했다.
성품이 순박하고 침착하여 말이 적었으며 실지를 속여 겉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사의(私意)로써 법을 굽히지 않았다. 집정(執政)이 일찍이 한치형을 위하여 그의 외손(外孫)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니, 이를 제지해 말하기를 ‘이 늙은 것 때문에 벼슬을 어리석은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태어난 지 18년 뒤에 벼슬에 나아가 세묘(世廟)ㆍ예묘(睿廟)ㆍ성묘(成廟) 및 아상(我上, 연산군을 말함)을 두루 섬겼으니 밤낮을 합하여 모두 52년이나 된다. 백부(栢府, 사헌부)에 들어가서는 감찰(監察)과 장령(掌令)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면서 조정의 기강을 진기(振起)하였고, 은대(銀臺, 승정원)에 올라서는 좌부승지(左副承旨)와 좌우 승지(左右承旨)를 지내면서 왕명을 적절하게 출납하였으며, 전선(銓選, 관원을 전형하는 일)할 때에는 용사(用捨)가 공정하였고, 탁지(度支, 호조)에 있을 때에는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하였고, 두 도(道)에 감사(監司)로 나가 교화를 펼 때에는 선정(善政)으로 다스려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공신(功臣)에 봉해져 종정(鐘鼎)에 훈업이 새겨지고 기린각(麒麟閣)에 초상(肖像)이 그려졌으며, 경조 판윤(京兆判尹)을 지낸 뒤에 사구(司寇, 형조 판서)와 사마(司馬, 병조 판서)를 역임하니,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숨을 죽이고 군정(軍政)이 제대로 수거(修擧)되었다. 추밀부(樞密府)를 관장하며 도총관(都摠管)을 겸대하니, 임금이 의지하고 신임함이 중하였고 인망(人望)이 훌륭하였다. 삼태(三台, 의정부 삼정승)를 역임하며 백규(百揆)를 총괄하였으니 임금께서 심복(心腹)처럼 여기고 명당(明堂)의 주석(柱石)과 같아서 백성들이 바야흐로 그의 보살핌을 우러러 바랐는데, 병에 한번 걸리더니 오랫동안 낫지 않아서 일어나 일을 살피지 못한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어느 날 가인(家人)의 꿈속에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이 채색 가마를 어깨에 메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앞뒤의 위의(威儀)가 매우 성대하였으며 공이 홀연히 가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공은 이미 별세하였다. 이때가 홍치(弘治) 임술년(壬戌年, 1502년 연산군 8년) 10월 임인일(壬寅日)이었으니 공의 나이는 69세였다. 그해 12월 병오일(丙午日)에 양주(楊州)의 서산(西山) 이동(梨洞)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국가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공에게 족고(族姑)인 한씨(韓氏)가 있었는데 일찍이 중국 조정에 들어가 선제(先帝)의 궁인(宮人)이 되어 여러 황제의 권우(眷遇)를 받았고 성지(聖旨)를 내려 족인(族人)을 중국에 왕래하게 요청하였다. 이 때문에 한씨 일족이 누차 중국에 들어갔는데, 성화(成化) 연간에 공이 주청사(奏請使)에 충원되어 가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주대(奏對)하고 거조(擧措)가 예법에 맞으니, 황제가 특별히 서대(犀帶) 한 개를 하사(下賜)하였다. 공이 그 서대를 허리에 두르고 돌아오자 온 조정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천자에게 선물을 받은 것은 고금을 통틀어 한 사람 뿐이다.”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통명(通明)하고 확실(確實)하였으며, 일을 고려함이 주밀하고 기미를 알아챔이 귀신같았다. 벼슬에 나선 이후로 숱한 관직을 맡아 지내면서 한번도 잘못한 적이 없었고, 상신(相臣)이 되어서는 무릇 국가의 일을 밤낮으로 걱정하고 헤아리어 죽 벌여 적어서 벽에다가 붙여놓고 앉거나 누울 때에 바라보았고 마음에 얻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임금에게 계청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상신의 지위에 있은 뒤부터 폐단은 열거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이로움은 흥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공의 선취(先娶)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의 딸인데, 1녀를 낳아 사포 별좌(司圃別坐) 임유침(林有琛)에게 시집가서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임세창(林世昌)ㆍ임세방(林世芳)ㆍ임세분(林世賁)ㆍ임세□(林世□)이고, 딸들은 아직 어리다. 계실(繼室)은 부사(府使) 우연(禹?)의 딸인데 후사(後嗣)가 없고, 사자(獅子)라는 얼자(孼子, 서자(庶子)를 말함)가 있다.
공을 장사지낸 뒤에 나 홍귀달(洪貴達)이 일찍이 외람되게 말료(末僚)가 되어 공에게 지우(知遇)를 받은 것이 깊었기 때문에 묘지를 쓰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광릉(光陵, 세조)ㆍ창릉(昌陵, 예종)ㆍ선릉(宣陵, 성종)께서 서로 이어 훌륭하게 다스렸고, 우리 성상(聖上, 연산군)이 그 뒤를 이어 대동(大東)을 무마(撫摩)하셨네. 열성(列聖)이 다스리는 때를 만나 대대로 영웅이 있었는데, 훌륭한 우리 공께서 내리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여, 안위(安危)와 휴척(休戚)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하였도다. 묘당(廟堂)에 우뚝 서서 서대(犀帶)가 혁혁하니,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라 만인이 바라보았네. 오래까지 장수하여 백성들이 그 복을 받기를 바랐으나, 채색 가마를 내려 데려가니 하늘은 왜 서둘러 앗아갔나. 혼(魂)은 가지 않는 곳이 없고 백(魄)은 이 곳에 묻혔으니, 천추 만세토록 높은 벼랑 깊은 골짜기 변함 없을지라, 공의 사적 징험하려거든 이곳이 그 유촉(遺?)일세.
조선 전기의 문신. 형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지냈다. 좌의정이 되어 무오사화에 김일손 등을 처형하게 하고, 영의정 승진 후 연산군의 폭정을 충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갑자사화에 추죄되어 부관참시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그가 생전에 건의한 법은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첩의 아들 한수(韓遂)는 참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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