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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成事西原君韓公(諱 方信)

관리자 2023.10.09 09:18 조회 수 : 22

贊成事西原君韓公(諱 方信)

 

 

공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이며 무신이다.
우정승을 지내고 충혜왕묘에 배향되신 사숙공 渥(악)의 아들로  제학공 謝奇(사기)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니 동지밀직사사 卿(경)의 따님이시다.

공민왕 초에 누천하여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동북면병마사가 되고, 홍건적의 난에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었다. 1360년(공민왕 9) 10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세워 요양군사를 몰아 침입하여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화주(和州)에 주둔하여 동북쪽을 방비하였다.

 

이 때 여진이 변방을 침략하므로 홀면병마사(忽面兵馬使) 전이도(全以道) 등을 보내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삼선(三善)·삼개(三介)의 무리가 쳐들어오자 함주(咸州)에서 전이도 등이 방어하였으나 패하였다. 이에 한방신이 화주로 진군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그러나 다시 휘하의 제장을 나누어 삼면으로 공격하여 대파하고 양주를 모두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제수하였다.

 

뒤에 찬성사를 배하였으나 아들 한안(韓安)이 시역(弑逆)에 가담하였으므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이 보낸 이영(李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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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왕 11년에 공은 안 우, 이방실, 황 상, 김득배 등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맹공을 펼쳐 홍건적의 괴수인 사 유, 관선생 등을 참살하니 적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아 죽고 얼어서 죽는 등 시신이 성내에 가득하고 참수된 자가 십 여만명에 이르렀으며 적들이 元帝(원제)로부터 탈취하였던 옥새와 금은 보화, 병기 등을 노획하고 경도를 수복하였다.
이듬 해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정당문학에 승진하였으며,
부모님과 처에게는 3계급을 초월한 관작을, 아들 1인에게는 7품직을 宣授(선수)하고 자손들에게는 음직을 서임하며, 田 100결과 노비 10구 등을 하사 받았다.
이 해 원나라가 덕흥군을 세워서 왕을 삼고 요양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공은 첨의평리로써 동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김귀와 더불어 화주에 주둔하여 동북방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 때 또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하였으므로 공이 병마사 전이도, 이 희, 이용장 등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북변 사람 김방괘는 이성계의 고모부이다.
삼선과 삼개라는 두 아들이 있으니 여진에서 성장하였고 체력과 용력이 범인보다 뛰어났다.
원나라 덕흥군의 군병이 의주를 포위하고 선주에 칩입하자 이를 격퇴키 위하여 이성계가 급히 진군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이성계에게 감히 접근도 못하던 삼선과 삼개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여진을 유인하고 끌어 들여 화주 이북이 모두 함락되었다.
좌우로 적군을 맞아 연전연패하니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군사를 재정비하여 진격하도록 하고 이성계도 김 귀 등과 함께 3면으로 진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화주, 함주 등 잃었던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삼선과 삼개는 여진으로 달아난 후 돌아 오지 못하였다. 왕은 이성계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공에게는 비단을 하사하여 그 공훈을 포상하고 개선 할 때는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축하하였다.
곧이어 서원군에 봉하였고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승감을 선수하였으며, 훗날에 또 찬성사에 제수하였다.
공민왕 20년에 공을 첨의찬성사로, 이 색을 정당문학으로 또한 이성계를 지문하부사로 삼으니 신 돈이 주살된 때라 조정의 면모가 쇄신되었다.
왕은 흡족하여 주위 신료들에게
"요즘은 일반 민중들의 조정에 대한 평론이 어떠한가" 하고 하문하니 신료들이
"지금 백성들은 국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라고 대답하니
 왕은 기뻐 웃으며 가로되
"문관이나 무관을 모두 일류명사를 선택하여 재상을 삼았는데 이론이 있으랴" 하였다.

공민왕 23년에 자제위 홍 륜이 익비와 통정하여 임신되었음을 내시 최만생이 밀고하니 왕은 자기의 소원이 성취됨을 은근히 기뻐하며 말하되
"내일은 홍 륜을 죽여 이 비밀을 엄폐할 것인데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구나" 하였다.
최만생과 홍 륜은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그날밤 왕을 시해하엿다.
그 후 체포되어 국문을 열 때 한 안, 권 진, 홍 관, 노 선 등도 공범이라 고백하니 한 안은 공의 둘째 아들이요, 모두가 자제위 소속이다.
한 안은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가담한 바 없다고 끝까지 불복하였으나 홍 륜 등의 일방적인 증언에 따라 공범으로 취급 받아 홍 륜 등과 함께 주살당하였다.
공은 먼 곳으로 귀양가고 친속들도 유배되었다. 그 후 우왕 2년(1376)에 집의 김승득과 헌납 안 정 등이 한 안과 노 선도 홍 관과 권 진 등과 동일하게 부모처자까지 극형에 처하자고 주장하니 시중 이인님, 찬성사 목인길, 평의 변안렬, 정당문학 홍중선, 문하시중 경복흥 등은 그 당시 한 안과 노 선은 범행에 간여한 바 없다고 불복하엿음에도 주살해 놓고 또 그 친속에게 극형을 가중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왕은 이를 따르지 않고 체복사 이 영을 보내 공을 참화케 하고 장남 호군공 休(휴), 3남 녹사공 寧(녕), 4남 烈(렬)등도 모두 참하였다.

 

丙辰披禍時 아버지 한방신. 첫째 한 휴. 둘째 한 안. 셋째 한 녕. 넷째 한 열.이 連坐披禍.

막내 韓 任는 목숨을 부지하여 후에 검한성윤에 이르다.


태종 10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8월 19일(임오) 1번째기사
 박상문의 양천 변정을 오결한 김첨·한이·한임을 귀양보내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첨(金瞻)을 여흥(驪興)에, 전 계림 부윤(?林府尹) 한이(韓理)를 안성(安城)에, 전 철원 부사(鐵原府使) 한임(韓任을) 춘주(春州)에 귀양보내었다. 사헌부(司憲府)와 형조(刑曹)에서 박상문(朴尙文) 등의 양천(良賤)을 변석(辨析)하여 보니 과연 종천(從賤)시키는 것이 부당하였다. 이에 첨(瞻)과 이(理)·임(任)을 탄핵하고 수직(守直) 하였다. 임금이 첨(瞻) 등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리어 국문(鞫問)하고, 율(律)을 상고하니, 장(杖) 1백대에, 도(徒) 3년에 해당하였다. 이에 명하여 귀양보내었다. 첨(瞻)은 예조 의랑(禮曹議郞)으로 있을 때에 상문(尙文) 등을 종천(從賤)할 것으로 결절(決折)하였고, 이(理)와 임(任)은 민제(閔霽)·권홍(權弘)과 동종(同宗)이기 때문에 상문(尙文)의 일족(一族)을 천(賤)에 붙여서 역사(役使)시킨 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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