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科展試 行事]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중에 상당수가(특히) 서울과 서북지방 출신자로서 신분상 中庶 또는 평민인 장교와 군인들은 대개 직부전시로 급제하여 현역복무와 경제적 활동을 병행하였다고 한다.』~이것은 양반의 급제자와 신분이 다른 하층민의 급제자와 차이고 급제후의 出仕에서 차이가 있다.
展試에는 임금이 직접행차하게 되는데 정병을 필두로 취타대가 입장하고 그 뒤로 홍문대기, 주작기, 백호기, 현무기, 청룡기, 금백색기, 삼각기, 천하태평기 등의 의장기가 입장하고. 이어서 금월부, 은월부 등의 부, 금릭과, 은릭과 등의 과. 청룡당, 주작당 등의 당. 용선, 봉선, 청선 등의 선. 등의 여러 의장물들이 입장하게 된다.
왕은 어연을 타고 내직별감, 상호군, 호군, 재호군 등의 호위무사들과 함게 입장하고 그 뒤로 문무백관, 승지, 별감 등의 시종관원과 별시위, 내금위 등의 시위군사가 입장하며 그 규모는 약 6,200여명이다. 그리고 어좌를 중심으로 시위군사들이 왕의 주변에 위치하고 개장보고를 하게된다.
(과거급제자의 禮式服裝)
1. 어사화는 종이꽃과 참대오리 둘을 종이로 감고 비틀어 꼬아서 군데군데 다홍, 보라, 노랑의 종이꽃을 꿰었다. 한 끝을 모자의 뒤에 꽂아 붉은 명주실로 잡아매고 다른 한 끝을 머리 뒤로 휘어 앞으로 넘겨 실을 입에 물게 되어 있다.
2. 조선 말기 고종 때에 옷 색이 꾀꼬리색으로 변하면서 명칭도 앵삼이라 불리게 되었고 연두색 겉감에 황색 안을 받쳤으며 비단으로 만들어져 부드럽고 우아한 광택이 있다.
3. 삽금대를 띠고 목화는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공단 또는 융으로 만든다.
[지방에서 儀式]
지방 출신의 신급제자들을 위한 영친의(榮親儀)가 있어서 그들이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고 유가하였다. 급제자의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영친의 의식은 해당 지역 수령인 현감이 주관하고 그 의식을 담당하였다.
새로 급제한 사람이 주(州)에 들어오는 날, 그 주의 주관(州官)은 먼저 將校와 악공들을 州의 地境 근처까지 보낸 후, 州官도 주의 아전들을 대동하고 5리정(五里亭)까지 나가 관복을 입고 향탁 자와 절하는 (禮)자리를 갖는다.
이것이 끝나면 신급제가 앞서 가고 주관은 그의 뒤를 따라 신급제의 본집으로 가서, 간단히 술과 과일을 차리고 신급제로 하여금 그의 부모에게 축배를 드리게 하고 급제자의 부모도 주관과 급제자를 따라 관사(館舍)의 남청(南廳)에 간다. 주관이 친히 급제자의 부모에게 술을 올리고, 주식(酒食)을 내고 악(樂)을 주(奏)하며 잡기를 베푼다. 파연(罷宴)에 미쳐 새로 급제한 사람이 감사의 재배(再拜)를 한다.
[문희연 例]
광대는 一名 창우(倡優)이다. (솔창(率倡) 비단옷에 누런 초립을 쓰고 비단 조각으로 만든 가화(假花)를 꽂고 공작선(孔雀扇)을 들고 어지러이 춤추며 익살을 부린다. 재인은 줄을 타고 땅재주를 하는 등 온갖 희롱을 다 한다. (삼현육각을 연주하는 ‘세악수(細樂手)’, 춤추고 익살을 부리는 ‘광대’, 줄 타는 ‘재인’ )이때 광대는 노래하기를 “보라 아히 광대는 옥저 불고, 어른 광대는 단소 불고 오광대는 호각 불고, 선산에 소분하고, 구산에 소분하고 본댁으로 돌아가서, 부모께 현알하고, 도문잔치하고“ 이와같이 某邑某家에서 급제하였다고 하면 도문연의 행사에 광대들이 참여하여 흥을 돋으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전문적인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고 이들은 그지방의 官衙와도 긴밀히 협조하였다고 한다.
[과거급제자들의 到門宴 모습]
『(1710년 숙종36년 7월4일 권상일.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의 집 나무 두 그루가 쓰러 졌다. 원근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하느라 나무가 부러지는 장면에서는 권상일은 웃음이 나온다고 창대일기에 적었다.』
『1780년 정조4년 4월1일 무과급제 도문연 노상추의 일기에서는...
4월 초1일(기유) 볕이 남.
이른 아침에 가묘家廟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으로 갔다. 악공樂工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개령開寧 관아의 공인工人이다. 집에 도착해 제사를 지냈는데 음악을 연주하여 예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내당內堂에 들어가 큰 형수를 뵈었다. 1월 25일에 신주神主를 받들어 이곳으로 옮겨서 봉안할 때에 신주를 초당草堂의 벽감壁龕註 001에 봉안하였다. 초당은 식솔들이 1778년(정조 2)에 이사할 때에 와서 살면서 지은 막집註 002인데 ‘집[屋]’이라고 불렀다. 새로 맞이한 신부가 우리집 상방廂房에 와서 머물렀는데, 새 사람의 면목을 보니 외모가 아름다워서 다행이다. 다른 곳에 있는 내행內行의 경우 하회河回 류柳씨 집안으로 시집간 누이는 올 수 없었지만 황간의 민閔 서고모, 문경聞慶의 신申 서고모, 교동校洞의 박朴 서고모는 모두 와서 모였다. 민閔·신申 두 군君은 지난 23일 서조모庶祖母註 소상 때에 함께 와서 지금까지 계속 머물고 있었다. 집사람에게 지금까지 별탈이 없으니 다행이다. 도문연到門宴을 하는 자리는 집 왼쪽에 있는 허서방許書房의 논에 마련하였다. 아침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선배 1명이 와서 도개촌道開村 오른쪽의 정자나무 아래에 앉아 새 급제자를 부르니 좌랑佐郞 정택동鄭宅東이었다. 가서 맞이하여 집에 도착할 무렵에 선배 1명이 와서 태조진太祖津 옆에 앉아 새 급제자를 불렀는데, 주서注書 김기찬金驥燦이었다. 두 사람이 와서 석현石峴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새 급제자를 불렀는데, 도사都事 정지복丁志復씨와 좌랑 김진구金振久였다. 이렇게 저렇게 영접하고 잔치 자리로 모셔와 풍악을 울리면서 놀다 보니 날이 이미 한낮이었다. 선산 부사 이명걸李命杰도 잔치에 나와서 종일 있었다. 잔치가 끝나자 선산 부사가 먼저 일어나 관아로 돌아가고, 정도사, 김주서, 김좌랑, 정좌랑은 모두 우곡愚谷의 김운정金運鼎 집에서 묵었는데 그 집에 묵을 만한 초당이 있기 때문이다. 밤에 손님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2경(오후 9~11시) 쯤에 마치고 돌아오니 방마다 내외 손님들로 가득차서 나는 잘 곳이 없었다. 그래서 김국채金國采 집에 가서 잤다. 오늘 잔치를 보러 온 사람들은 거의 5~6천 명으로 뒷산까지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들판에서 풍악을 울리고 창唱을 하며 노는 일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삼월이십일일 경자
이날 임금께서 인정전에 나와 앉으시어 문무과의 합격자를 발표하고 예물을 내리며 축하하신다. 이날 새벽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입궐했다. 창덕궁 돈화문 바깥에 이르러 문이 열리고 훈련원 봉사가 인도하여 입궐했는데, 진선문을 지나서 榜에 적힌 이름 순으로 열을 지어 인정문 밖에 섰다. 백관이 차례대로 인정전 뜰에 섰고, 7백 금군이 진을 이루어 배관 좌우에 섰는데, 기타 액정(掖庭) 궁예(宮隷)는 셀 수가 없었다. 또 무더기 꽃과 나무가 殿庭의 좌우 뜰 아래에 세워져 있다. 호명하는 차례대로 文武榜이 들어가는데 각각 동문과 서문으로 문방이 나아가 서고, 무방이 나아가 섰다. 서쪽으로 줄을 서는 것을 마치니 인의(引儀)가 흥배(興拜)를 불렀다. (신진들이) 4배례를 행하고 나아가 앉고, (임금이) 선온 각 1배, 황대구 1편, 홍패와 각자 두 가지 계수나무 꽃을 꽂은 幞頭를 하사했다. (신진들이) 일어나 4배를 했다. 퇴출하여 문을 나오니 해가 이미 巳時였다. ~ 노상추 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