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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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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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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EJOUNG!------Hae Nam.....

[조선왕조실록 中宗時代]

관리자 2023.10.14 11:50 조회 수 : 25

 

[조선왕조실록 中宗時代]

 

♣ 1519년 <기묘사화>

♣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두둔했던 좌의정 安瑭과 그 자손들이 1521년 남곤, 심정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를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 중종33년(1538년) 9월30일 왕조실록에 전라도 관찰사가 ~ [진도군은 편소한 절도이고 토지가 좁은 데다가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경작할만한 땅이 없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도 및 경기·서울·충청도 등지에서 죄를 짓고 노복이 된 사람들을 해마다 들여 보내고 있어 순행하여 점고해 보니 거의 3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수에 그치지 않고 뒤에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뒤를 잇고 있는데다 모두가 빈손으로 들어와 원주민들에게 얻어먹게 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주객(主客)이 모두 피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관도 일일이 돌봐주지는 못하고 관진(關律)마다 출입마저 금지해서 마음대로 나가서 빌어먹을 수도 없으므로 굶어죽는 사람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 盧守愼는 1548-1567年까지 진도에 귀양 와 玉州2千言를 지었는데

[1] 진도의 해변 浦口는 왜구의 노략질에 피해가 막심하였고

[2] 右水營의 守兵들은 풀[草]로 언덕에 움막을 지어 살고 있어 비참하였고

[3] 진도군에는 流言蜚語가 떠돌아 민심이 흉흉하였고

[3] 고을은 凶年이 들어 옷으로 식량을 바꾸고 돌림병까지 퍼져 있고

[4] 고을이 술렁거려 떠돌아다닌 者가 많았고

[5] 地震이 일어났었다.

 

♣ 1555년 명종10년( 5월11일~25일)에는 달량포 왜변에 진도는 큰 피해를 입었다.

 

[珍島郡誌에 姓氏들의 족보에 대한 기록]

珍島郡誌를 그대로 옮기면-------

진도 토박이 성씨들은 조선 중기 이후 이본동조론이 일반화되면서 家 格을 높이기 위하여 토성들이 아주 오래된 신라지역 토성이나 고려개국초기 공신 성씨들에 합본하는 것이 유행을 이루면서 오늘날의 성씨 본관의 대종을 이뤘다. 조선 중기 이후에 외지 본관을 쓰고 이본동성의 선대에 그 상대를 연결한 흔적이 없지 않다. 이 같은 사실을 15~16세기에 만들어진 육지부의 큰 문중 족보와 진도 성씨들의 근래 족보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육지부 성씨와 실제로 근본이 같다 하더라도 교통이 나빴던 시절의 족보 수단이 어려웠던 사정 때문에 누보가 계속되다가 뒤늦게 합 보하는 과정에서 선세대 계보나 생존연대가 맞지 않아 조정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같은 지방에서 혼인이 중첩된 성씨 간의 인척들 생존연대가 서로 어긋나 있다. 무리하게 계대하는 과정에서 없던 조상을 끼워넣기도 하고 삭제한 조상들도 없지 않다. 실록 등 역사기록에 보이지 않는 流配 入島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고 실재하지도 않은 관직도 있다.

~특히 진도 집안들은 육지부와 교통이 어려워 누보된 경우도 많지만 섬에 산다는 것만으로 鄕.所.部曲 사람이나 驛村.牧場 노비층과 다름없는 海島사람 취급을 하여 족보수단을 기피당하기도 하고 간행비 충당을 위하여 내야 하는 수단비 때문에 누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진도의 경우 조선중기 때까지 중앙관료의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녹권이나 품계를 받는 경우는 있었지만 직책를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향리를 세습한 중인 아전들은 군수를 보좌하지만 급여가 없어~ 가렴주구에 지쳐 土姓吏族들이 본관을 이탈하거나 출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도의 현존 성씨중 오래 살아온 집안이면서도 후손이 적은 성씨들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때까지도 토착성씨들은 그 고을 이름을 본관으로 썼다. 이들은 임진왜란 전후에 명문거족의 본관 성씨들에 합보를 하는 것이 유행하여 영조35년(1759)에 만든 [여지도서]에서는 진도군내 토박이 본관 성씨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1761년 [옥주지] 진도 고군면 향동 출신인 김몽규가 편찬한 책에서도 22개 성씨가 있지만 본관 토착성씨들은 없다. 또한~ 예부터 피난오거나 귀양와 산 성씨가 8姓; 창녕조. 밀양박. 면성박. 김해김. 청주한. 제주양. 경주박. 진주정. 그 외 혼인관계 등으로 입도한 14姓이 있다고 하였다. ---- 

以上 郡誌에서 복사함

 

당시에는 姓氏를 바꾸고 名家에 합보를 하면 그 지역사회에서는 양반으로서 행세할 수가 없으므로 아주 먼 고장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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