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전에 論
朝鮮時代 土地擴張에 관한 論文을 보면 土地所有權은 첫째 代金을 주고 土地를 買入하는 방법과 둘째는 祖上으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셋째는 特殊한 예로 無主地인 땅 중에 農作物이 자라지 못한 荒蕪地나 갯벌을 干拓하여 耕作이 가능하게 하여 所有權을 取得하는方法 이세가지 방법은 朝鮮法典인 “經國大典”이나 “續大典”에 規定되어 國家로부터 私的 所有權을 보장되었다.
國家에서는 그 대가로 良田 등의 土地事業을 통해 土地臺帳에 登錄하고 結稅를 農場作況에 따라 稅金을 徵收하였다,
干拓事業을 하매 地方縣에 事業告知를 하기위해 여러 節次와 承認과정에 관해 國內現存하는 資料(立案文記)는 全無하다.
집권 양반들은 潮水干滿 차이가 심한 서해안 일대에 입안 절수란 관의 절차를 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소유권을 관에 신청해 허가를 받아 부를 쌓았다. 이를 언전(堰田)이라 하였다.
언전을 하기위해서 在地 양반들은 황무지와 바닷가를 일구어 전답을 만들고 세거 지를 옮기고 이렇게 세월이 흘러 집성촌과 마을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의 발판이 되었다.
*안동 지방 재지 양반층은 지역 특성상 산간 평지 지역에 진출하여 世居地를 정하고, 농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00여 년 동안 경지 면적을 무려 1.5배나 늘렸다. 고 한다
*요즘 선비들의 풍습에 대해 사대부들 사이에 '부자가 된 뒤에야 착하게 된다'라는 논의가 있었다. 비록 이름난 선비일지라도 다 산업 경영을 계책으로 여기고 갈대밭, 개펄을 가리지 않음이 없었고, 심지어 묵을 땅마저도 물길을 막고 둑을 쌓는 일에 사람을 동원하여 이를 하고 있다.
[출처] 왕조실록 선조 13년 5월
*중앙의 궁방이나 권세가들이 서남해안 지역에 언전(간척지)을 대규모로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보수 구휼에 의한 노동력 확보에 힘입어 가능하였다. 국가는 극심한 흉황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사또(本倅)가 고공·비부 등 투탁인 들을 내쫓으면 오히려 이를 금지하면서 보수 구휼을 권장하였다.------- [출처] 신편 한국사 30| 작성자 노원앙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윤10월 28일 갑인 3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금법이 없이 백성들과 함께 이용하였으나, 근년 이래 내수사(內需司)와 여러 궁가(宮家) 및 사대부들이 서로 앞다투어 불법으로 점유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인이 있는 전지를 공공연히 빼앗기까지 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시장(柴場)·제언(堤堰)·해택(海澤)·어전(漁箭) 중 입안 절수(立案折受)하는 것은 일체 금단하여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을 개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산림과 천택을 백성과 함께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 시행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선왕 때 내려준 곳만은 금혁(禁革)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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