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2]
(盧尙樞 1746년~1829년) 본관은 안강(安康).자는 용겸(用謙),호는 서산와(西山窩)이다. 정조(正祖) 4년(1780년) 무과에 급제하여 1793년 삭주부사. 1811년 가덕첨사(加德僉使). 1825년 가선대부에 오르고 중추부동지사에 제수되었다.
그의 일기에 보면은 .........................
노상추는 서얼숙부 盧洙가 족보에서 “庶” 字를 빼주기로 했기 때문에 분통이 터졌다. 노수는 노상추 아버지의 庶孼 사촌으로 노상추에게는 오촌당숙이 된다. 노상추 할아버지 죽월공이 일종의 집안 稧를 만들 때 노수를 책임자로 270냥을 주고 잘 관리하라 하였다. 그러면 내가 벼슬을 끝내고 돌아오면 보고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노수에게 맡겼다 십 수 년 지나 죽월공이 계의 돈이 얼마나 늘었는지? 토지는 그대로인데 그 외 물건들은 돈으로 바꾼 후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몇 달후 도독이 집에 들어와 돈을 몽땅 털어갔다고 보고하고 자기집 여종을 잡아 문초를 하였다. 여종은 도독이 들지 않았는데 무슨 물건을 잃어버립니까? 하면서 승복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죽월공이 천 냥이나 되는 돈을 탕감해주자 노수는 다음날 400냥과 토지문서를 내놓고 계일을 그만 두었다. 그 후 3년 후인 1755년 乙亥 대흉년 때부터 노수는 감췄던 토지와 노비 등을 슬슬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부가 되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노상추는 일기에 썼다. 그리고 1766년 11월2일 집안 제사에서 노수는 족보에서 처음으로 庶를 빼달라고 요구한다. 노상추는 宗中를 모욕하는 처사라고 거절한다.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요구를 하다가 1771년에 마침내 종회에서 빼주기로 한다. 노상추는 불참한다.
“이런 일이 한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닌데, 끝내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구나. 아 우리집안이 망하는 것은 하루를 기다릴 것도 없겠다. 일개 서얼의 말을 이렇게 쫓아가다니 오호 통재라?”
탄식했다. 노수가 막강한 재력으로 문중을 유리하게 돌렸던 처지였다. 노상추는 이런 대세를 따르지만 나중에는 7년 후쯤 노수의 생일잔치에 갔고 그 집에 머물기도 했다. 노수가 죽자 “哀憐애련의 정”을 느끼면서 안타까워했다.
조선 후기의 서얼들의 신분 상승 과정을 사실적이면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삭주부사로 부임한 노상추는 그곳에서 祖父 노계정(박천군수, 위원군수, 전라우수사)이 박천군수로 재직할 때 守廳妓에서 조부의 賤産(庶子.庶女들을 말함)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조선시대에 50세 이하 90%이상의 남성이 배우자가 사망한 이후 재혼한 것으로 나타난다 ~ 전처 사망한 이후 1~3년내에 남성들은 70% 이상이 재혼을 하고 있다. (박희진씨의 논문에서)
호적은 主戶와의 관계에 있어 妻妾을 여러 가지 용어로 기록하고 있다.
*妻. 前妻.
*(後妻. 繼妻. 二妻. 末妻. 代妻.는 첫번째 처가 사망한 이후 正室로 들인 後 妻)
*(妾. 側室. 副室. 花妻.는 妾으로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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