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137권,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1월 4일(계유) 1번째기사
한명회의 죄와 한치형의 자격에 대해 여러 신료들과 논의하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대사헌(大司憲)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신(臣) 등은 한명회(韓明澮)를 복직(復職)시킨 것이 옳지 않다는 일을 가지고 여러 번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인신(人臣)의 불경죄(不敬罪)는 어찌 반드시 일로 나타난 뒤에 죄를 주겠습니까? 처음부터 훈구 대신(勳舊大臣)이라 하여 다만 직첩(職牒)만 거두었으니, 죄는 중한데 벌은 가벼웠으므로 본래 옳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대간(臺諫)에서 여러 번 말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고, 한 달이 못가서 직첩(職牒)을 돌려주었으며, 또 얼마 되지 않아 복직을 시켰으니, 신은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의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어떠한가?”
하니, 영사(領事) 노사신(盧思愼)이 대답하기를,
“공(功)과 과실(過失)은 마땅히 서로 평준해야 하는 것이니, 한명회는 비록 죄가 있으나 공으로써 용서하는 것도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세(語勢)로 보아서는 무례(無禮)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정이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이 정도를 가지고 원훈(元勳)을 버리겠는가? 말이 불경(不敬)스러웠으므로 직첩을 거두었었고 훈로(勳勞)가 있었으므로 복직을 시킨 것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더구나 사람의 징계는 세월이 오래고 가까운 데에 달린 것은 아니다.”
하고, 이에 여러 재상(宰相)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각각 생각한 바를 말하고 임금을 두려워하거나 간관(諫官)을 꺼려서 입을 다물지는 말라.”
하였다. 지사(知事) 서거정(徐居正)이 아뢰기를,
“신은 한명회의 일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하고, 김승경은 말하기를,
“한명회가 정동을 압구정(狎鷗亭)에 초청하여 호화로움을 자랑하려고 보첨(補?) 을 설비할 것을 청하였으나 주상께서 들어주지 않으셨고, 차일(遮日)을 설비할 것을 청하였으나 또 들어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한명회는 울분을 터뜨리며 이에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 아내가 병들어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승지(承旨) 김세적(金世勣)과 상전(尙傳) 김자원(金子猿)이 모두 있었으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에, ‘그렇다면 나는 가지 않겠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가?”
하였다. 김승경이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고, 김승경이 또 아뢰기를,
“한명회의 죄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북경[京師]에 갈 때에는 성상 앞에서 유둔(油芚)을 청하였고, 또 사적으로 중국 조정에 바쳐서 인신(人臣)이 사사로이 교제하는 죄를 범하였으니, 죄과(罪過)가 실로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에 경(卿)은 승지(承旨)로서 사세(事勢)의 부득이함을 자세히 알 것인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김승경이 말하기를,
“정동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잔치를 청하던 날에 한명회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했으나 주상께서 들어주지 아니하시니, 정동도 한명회의 무례한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감히 다시 청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정동으로 하여금 한명회의 복직됨을 알게 한다면 아마도 전하의 깊이를 엿볼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때는 무례함으로써 죄주었으나 지금은 훈구 대신(勳舊大臣)으로써 용서한 것이니, 비록 정동이 듣는다 하더라도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승경이 또 아뢰기를,
“한치형의 서대(犀帶)는 황제(皇帝)의 명에서 나온 것이지만 참찬(參贊)은 황제의 명이 아닙니다. 서대만도 만족한데 어찌 반드시 참찬을 제수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매양 한씨(韓氏)의 족친(族親)이 북경(北京)에 가게 되는데, 만약 황제가 가는 사람마다 관작(官爵)을 명할 경우, 들어주지 않으면 한치형(韓致亨)의 전례가 있고 들어주면 사람의 자격이 걸맞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의 작상(爵賞)은 모두 중국 조정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처음에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사간(司諫)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
“신 등은 한치형의 자격이 못났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을 다시 막을 수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 처음에 한씨의 족친이 한씨에게 사사로이 바치는 것을 우리 나라에서 금하지 아니하였다가 지금은 상공(常貢)이 되었습니다. 고려[前朝] 말엽에 원(元)나라에서 달로화치(達魯花赤)를 배치하여 모든 일을 우리 나라로 하여금 자유로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것을 거울 삼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한씨의 서계(書契)를 보건대, 모든 일을 황제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황제가 한치형에게 서대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이 서대에 준하는 관직을 제수하라.’ 하였으니, 뒷날에 만약 어떤 관직을 제수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더구나 ‘한치형의 인물이 합당한가?’ 물었더니, 대간(臺諫)에서 이미 ‘자격이 합당합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그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김승경이 말하기를,
“국법(國法)에 북경(北京)에 가는 사신(使臣)에게는 으레 임시 직함(職銜)을 주어서 보내는데, 비록 한치형을 시켜서 북경에 가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반드시 참찬이라야 되겠습니까?”
하고, 김여석이 말하기를,
“한치형뿐만이 아닙니다. 한충인(韓忠仁)처럼 광망(狂妄)스러운 자와 한치량(韓致良)처럼 용렬한 자와 임유침(林有琛)처럼 무식한 자도 한씨의 족친이라는 이유로 모두 직사(職事)를 받은 것은 매우 미편(未便)합니다.”
하였으며, 김승경이 말하기를,
“부정(副正)은 3품(品)의 대관(大官)인데, 한치량에게 줌은 너무 외람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뒤에 비록 황제의 명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인품(人品)이 옳지 못하면 인품이 부족하여 관직을 제수할 수 없다는 것으로 대답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전례를 걱정하는가? 자제(子弟)에게 관직을 제수하라는 것은 칙서(勅書)에 기록되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였다. 김승경이 또 아뢰기를,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이 김칭(金?)과 길거리에서 기생(妓生) 홍행(紅杏)을 두고 다투느라고 머리를 움켜쥐고 서로 힐난(詰難)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기풍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김칭을 구속하고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원(源)을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사신이 논평(論評)하기를, “한명회(韓明澮)의 불경죄(不敬罪)는 온 조정(朝廷)이 다 통분하게 여기는 것인데, 서거정(徐居正)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것은 입을 다문 것보다 더 심한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137권 2장 A면
【영인본】 10책 286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외교-명(明) / *역사-사학(史學)
[註 11873]보첨(補?) : 규모를 크게 하기 위하여 처마를 더 잇대어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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