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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당현정(棠峴亭)

관리자 2024.07.17 17:57 조회 수 : 24

해남 당현정(棠峴亭)

 

오유(五柳)개 벽파진(碧波津)에 돛단 배 돌아온다

삼지원(三支院) 석양(夕陽) 노을 추도석도(秋島石島) 반가워라

옥포(玉浦)에 저녁 연기(煙氣)가 임 반긴가 하노라

초립동(草笠童) 쪼으려고 매바위 흔들흔들

일엽편주(一葉片舟) 아롱아롱

포구(浦口)에 바구니 가득 고기 담고 돌아오네

 

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8경중에 4경에 해당하는 옥포귀범(玉浦歸帆)을 표현한 것이다.

 

면에 정자로는 부곡리 조선 명종때 지어졌다는 춘정(春亭)과 소정리에 소정(小亭), 그리고 외압리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에 외입마을 출신 당현(棠峴) 이영규(李泳奎 1882~1960)의 호를 빌어 지었다는 당현정(棠峴亭)이 있었다. 1965년 사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영규의 당현유고집(棠峴遺稿集)에 우당 박재빈이 1959년 정자주인과 만나 유숙하면 지은 당현정기(棠峴亭記)에서 정자를 지은 의미를 알 수 있다.

 

기에서 호를 당현(棠峴)으로 한 것은 "우리고을에 옛 이름 당악(棠岳)이기에 그 당 자와 내가 살고 있는 북쪽에 부아산(負兒山)이 있는데 산이 높지 않고 수려하여 우리 고을의 고호를 잊지 않고 사는데 가까이 있는 산을 사랑하여 스스로 호를 한 것이다"며 적었다.

 

그리고 정자 주인에 대해서는 "덕성이 온순하고 기질이 온순하며 수신제가의 근검으로 근보을 삼고 대인접물에는 화열로 주를 삼으며 이글에 종사하며 가르침을 게을리 아니하며 손에 책을 놓지 않고 백수에 까지 이르니 글을 배우는 자들이 자기의 지꺼기를 씻어내고 그의 뜻에 깊이 함양하게 된다. 씻은 것은 그때를 버리고 새로움을 얻는 것이요 마시는 것은 그 양을 채우고 남은 갈증이 없게 함이니 이에 수업하는 문인들이 가장 많아졌다"고 알리고 있다.

 

이영규는 매사 이사풍의 문인으로, 평생 재야의 선비로서 기품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13세 때 찬익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20세의 나이에 춘정서재의 훈장이 되었다. 본래 춘정서재에는 이영규를 비롯해 찬익의 자손들과 동네아이들이 다니던 서당으로 훈장이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을 표하였는데, 이때 찬익이 좋은 선생 한분 추천해주고 가라는 말에 훈장은 이영규의 기재를 높이 사 그를 추천하였고, 그는 20세의 어린 나이에 서당 훈장이 되어 죽는 날까지 후학을 가르쳤으니 살아생전 배출한 제자만 해도 천여 명에 면장이 12명이나 배출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사후 제자들이 효우계를 조직하고 계봉(溪峰) 김진천(金鎭千) 등이 지은 당현정운(棠峴亭韻) 제영시 93편이 전하고 있어 시단을 방불케 하고 정자 주인의 제자들이 많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棠峴(호는 당현, 이고)珠淵(이영규의 자는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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