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내유리 대내산 고양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1413년(태종 13) 고봉현과 덕양현德陽縣을 합쳐 高陽縣이 되면서부터이다. 조선조 전기부터 고양동으로 고양군청이 이전되기 전까지 이곳 마을에 고양군청과 객사가 있어 외지에서 온 관원들이 머무는 객관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고읍마을 국사봉 아래에 가면 당시 군청 터가 남아 있다.
◾내산촌(奈山村)내유동을 이루는 마을 로 통일로에서 명봉산 동쪽에 위치한 자연촌락의 동네이다. 내유동은 조선조 영조년간에 발간된 고양군지 등의 기록에도 보이는 오래된 마을이다. 당시의 기록에는 내산리(柰山里)로 표기되어 있는데 내동촌(內洞村)과 계 기동(鷄基洞)마을이 있고 모두 102(戶)가 있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 村落중 우리 叅議公派선조님의 後繼 6위 세거 하셨던 고향이다. 옛 구전(舊傳)으로 전하는 이야기속 에는 시칭낙하명유(時稱洛下名儒)로 알려진 선조사부(宣祖師傅)韓胤明 선조께서 선산 건너편 마을에 경모사(景慕祠)배움의 학당을 세워 지내셨던곳 이기도 하다. 고양군(高陽郡)내산촌(萊山村)에서 시묘(侍墓)조상 무덤을 지키고 살았는데, 내산동이란 이름은 오래전부터 마을에 능금(奈)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선 조의 고향에는 밭과 논에서 쉽게 볼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유산촌(遊山村)놀미 유산마을은 내산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한 자연촌락 으로 일명 놀미로 부르기도 하였다. 유산촌은 명봉산 아래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 마 을이 었는데 본래 유산을 놀뫼라고 부르다가 놀미가 되었다 한다. 그후 1911년 조선기록지지 기록에는 이 지역을 내유산리(奈遊山里)로 표기 했다. 내유리는 이 후 행정구역을 개편 내산리의 내(柰)자와 유산리(遊山里)의 유(遊)자를 따서 내유리가 되었다가 후에 오늘날 내유동이 되었다.
◾명묘골 유명한 분이 묻힌 묘가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유명한 인물이 묻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조선영조년에 발간된(高陽郡邑誌)全 고양지역에도 왕실 묘역이 많이 위치하여 왕실 가족, 후손들이 묘역 인근에 궁방전宮房田과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집단으로 살게 된 경우도 많았다. ①임금이 공신전(功臣田)이나 사전(賜田)을 내릴 때 녹권(錄券) •교서(敎書) 등과 함께 사여(賜與)의 대상을 기록하여 내리는 지패(紙牌). 나라의 임금이 내려 준 땅 현재 관산동은 관(官)자를 쓰고 있다. 이곳을 관산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조 전기부터 고양동으로 고양군청이 이전되기 전까지 이곳 마을에 고양군청과 객사가 있어 외지에서 온 관원들이 머무는 객관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은 철마산과 명봉산의 능선이 남북으로 이어져 파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은 공릉천이 북쪽으로 흐른다. 공릉천 충적지는 넓은 평야를 이루어 농업이 활 발하다. 대자동은 내유동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인구밀도가 낮고 산이 많으며 자연촌락이 많은 마을이다 내유동(奈遊洞)이라는 지명은 내산(奈山)과 유산(遊山)을 합쳐 내유리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곳에 全羅監司를 지낸 한전(韓磌:1408년~1447) 墓 와 嫡子 전라병마절도사 한충인(韓忠仁:1426~1504)墓. 永眠하여 계신곳이다. ▪15세 韓訓1444년 甲子生. 16세 韓鯤1496년 丙辰生. 17세 韓胤明1526년 丙戌生. 18세 韓惟省1550년 推定. 선조의 墓가 潛寐(잠매)하여 계시다. 그리고 참의공 한전(韓磌:1408년~1447)의 여섯째 아드님 이신 한충상(韓忠常)1444년推定세종26년 할아버지의 墓 先塋下 下兆 永逝(영서)하여 계시다
고향땅 이곳 내유리에서 참의공 선조께서 유년시절을 보내셨고, 고려조 恭愍王弑害事件에 선계의 피화도 있었지만 한녕(諱寧)의 아들이신 한영정(韓永矴1386推 定) 祖考께서 이땅에 살 수없음을 아시고 外祖父(權仲和1322~1408)의 도움으로 明나라 에 亡命하시었다가 따님 두 분이 明太宗麗妃로 選入되시고 宣宗皇帝의 恭愼夫人으로 選入되시어 西城府院君에 冊封되어 錦衣還鄕하니 나라에서 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에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를 命하였고, 조선 태종때 조선 초기 무신으로 활동했던 장인(丈人)김영렬(金英烈1370~1404)인물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해 1401년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됐고 친이방원의 정치적 입장에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 중앙의 삼군부에서 실제 병력동원을 관장했다.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김영렬은 좌명공신으로 확고 한 명성과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원이 복원 되면서부터 父親 韓永矴(朝鮮朝 中訓大夫 淳昌郡事)엮임 하셨고, 이곳 내유리를 食邑(옛날에, 국가(國家) 에서 특(特)히 공신(功臣)에게 내리어 지내셨으며) 세종 1년 1월 17일 임술 8번째기사 1419년 한확(韓確)의 아우 한전(韓磌)으로 의영고 승(義盈庫丞)을 삼고, 호조에 명하여 7품관에 해당한 녹(祿)을 특사하였다. 蔭職(음직)으로 官 에 나가신걸 보아 그후 부터는 한양(漢陽)에 거주 하신걸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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