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은 14세 한충인(韓忠仁)선조의 妻家 丈人김중엄(金仲淹:安東金氏)의 세거지(木稀島:목희도)이다. 옛지명을 통하여 알아본바 松峴里(솔개)와 木稀里(나무드머리)가 합하여 지금의 元興里이며, 木稀島(나무드머리마을)라 하여 청자를 굽던 마을에 나무를 베어 땔 감으로 써서 나무가 드물다해서 부른 마을 이다. 고양군지에 조선시대로 부터 목희리로 표기 되어 있다. 연산군10년(1504년)4월 고양군의 혁파 문제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연산10 甲子士禍 1504년 6월4일 부관능지(剖棺凌遲)하고 적몰하며,아비 및 동생은 장(杖) 1백 에 처하여 외방(外方)으로 내쫓으라. 그후 1505년燕山11년9월19일 할아비 및 아재비·조카는 비록 죽었더라도 모두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이 일은 율문(律文) 에 없는 형벌로 다스린다.(甲子禍籍기록子女와 그 동족까지 연좌되었다.) 하여 家門의 避禍를 받았으며, 8월에는 고양을수렵장으로 만들어 금표(禁標)를 세우고 군의 창고 곡식을 파주로옮겼다. 또한 연산군 11년 7월에는 금표지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연산군 말엽의 고양군 혁파 사건은 고양 지역에 일체의 주민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관청, 가문, 가옥들을 텅텅 비게 만들었다. 또한 사패지로 하사받은 토지나 능침지는 관리할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되었고 관청의 관사는 모든 역사적 기록이 분실되어 실질적으로 고양군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고양을 떠난 주민들은 황폐화된 고양 땅으로의 복귀를 외면하였다. 이미 허물어진 집과 황폐화된 토지, 도축되어 버린 가축은 중종반정 이 후 군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전까지 완전히복구되지 못했다. 이러한 황폐함은 중종반정에 의해 일부 복구되기는 하나,1498년戊午史禍 昭陵復位 15세(韓訓)할아버지의 죽음과 1504년甲子士禍 廢妃尹氏事件 14세(韓忠仁)할 아버지의 사망후 목희도에서 내유동으로 移葬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중종1년(1506년9월20일) 전조(前朝:연산군)에서 무고하게 죄를 입은 자 홍문관. 대간 으로서 죽음을 당한 자들은 모두 곧은 말을 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 사람들을 모두 추증하여 작위를 주되,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통정(通政)이나 가선 (嘉善)을 주고 그 자손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녹용(錄用)하소서 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고(師古), 아명은 학이(學而),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증조부는 군사(郡事) 한영정(韓永矴), 조부는 참의 한전(韓磌), 부친은 수군절도사 한충인(韓忠仁)이며, 모친은 돈녕부 승(敦寧府氶)김중엄(金仲淹)의 딸이다.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의 처남이다. 1486년 식년시에 생원·진사 양시(兩試)를 거쳐, 1494년(성종25) 문과에서 장원을 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수찬·소격서령을 지냈다. 1498년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의 묘제의(廟制議)를 송나라 인종의 고사(故事)에 따라 백세불천지주(百世不遷之主)로 할 것을 기초(起草)한 사건에 연루되어 - 8 이성(利城)에 부처(付處)되었으나, 1501년 특별히 풀려났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능지(剖棺陵遲)의 화를 입었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해동문헌필 원편』을 인용하여 글씨를 잘 썼다고 하였다. 그리고 『초로관주(草露貫珠)』를 인용하여 필적(筆蹟)을 모간(摸刊)했다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훈 [韓訓]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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