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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EJOUNG!------참의공파 先系 이야기(한진휘 論)

16세 韓鯤(한곤)...2

관리자 2025.03.18 17:48 조회 수 : 43

그러나 훈(訓)할아버지는 연산군의폭정에 1498년 김종직의 조 의제문 사건때에 소릉복위(문종의비:현덕왕후권씨)묘를 보살피라는 충간을하다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1504년갑자사화(폐비윤씨:연산군생모)사건때에 모든 사림(선비)들이 폭정을 견디지못할 때, 14세 충인(忠仁)할아버지께서는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 (邊郡:가족이흩어짐)으로 이사하여 살게하였으며, 모든 책임을 지시고 사위인 신수근앞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때까지 장안[居長安]거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186~187번지로 장안이라 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는데 도읍을 가리키는 말을 장안 이라 한 것과 일맥상통하며,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평창동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 성북 구 정릉동, 동쪽은 성북동과 접하고 있으며 한양 에서 거주 한것으로 사료 된다.

 

◾치마바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중종이 부인을 잊지못하자 부인이 자신의 치마를 이 바위에 걸쳐 놓아 보이게 했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 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 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신수근(愼守勤)庚午1450세종32 配:한은광(韓銀光)丁卯1447세종29년. 端敬王后1487(성종 18)∼1557(명종 12). 조선 제11대 왕 中宗의 妃. 外祖父 한충인(韓忠仁:1426~1504)

 

◾16세 한곤(韓鯤).한붕(韓鵬) 先祖의 이름(生諱) 이야기 곤(鯤)은 바닷고기의 이름으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어 그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고, 이 고기가 변화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는데, 붕새의 등 너비는 또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鵬之 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사람이 물욕을 벗어나서 타고난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곤의 변화에 빗대서 한 말에 선조의 生諱이다. •17세 韓胤明:丙戌1526生중종21년 선조사부 이항의문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이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변별(辨別)하는 잣대 중 하나는 그 사람의 벼 슬에 나아가고 물러남(進退)을 살피는 것인데 군자는 평소에는 도리를 닦다가 기회가 되면 벼슬에 나아가 백성(小人)들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일을 자신의 도리 로 삼는 사람들이다. 김계선생의 묘갈명에 을사 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에 징계된 여러 노 선생(老先生)이 가끔 몰래 모여서 강의하고 글을 가르쳤는데, 공이 바로 기꺼이 그 문인(門人)이며 고제(高弟)인 한윤명(韓胤明) 과 종유 (從遊)하자, 더러는 화(禍)의 빌미라고 지목하였지만 못들은 사람처럼 하고서 날마다 반드시 모여서 토론(討論)하며 지조 유지에 더욱 힘을 썼다. 남계선생의 문집에 나타난 자(字)는 한사경(韓士冏) 胤明 으로 나타났으며. (士炯:빛날형.으로쓰기도하고 빛날경)으로도 하였다. 호(號)는 坰菴(경암:서울에서멀리 떨어져 있는곳 들경(坰)으로 도 썻다. 竹川(박광전)先生文集卷之七 문집에 보면 爲己之學(위기지학) <자기를 위하는 학문, 곧 도학>에 힘써, 坰菴(경암)韓胤明(한윤명)과 경전의 옛 뜻을 토론하며 힘써 학업을 돈독히 하였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율곡선생 제문에 문학이 영원히 흐르고 정주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니 난초지초는 불에 타도 그 향기는 남는 것이다. 사림으로는 봄이 오기 직전 하나의 꽃망울과 같다 하셨다.(栗谷祭文畧曰沂流尋源日有功程蔚然芝蘭不焚自聲士林减春一片花零事載石潭日記) 明宗朝 윤명(胤明:선조사부)께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윤임(대윤)과.윤원형(소윤)의 소용돌이에(一齋일재李恒이항)호남지역인 문사들과 從遊하며 門人인(徐克弘 서극홍:徐繪의子)윤종(丈人徐繪)할아버지와는 처남남매 이며 귀향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17세:윤명胤明.윤종胤宗.18세:유성惟省,유존惟存) 선조께서는 1561 년 명종16년1월15일 겨울에 父親 鯤께서 天壽를 누리고 下世하시니 경기도 고양으로 귀향 하여 성빈(成殯)한 뒤에는 의복(衣服)과 침식(寢食)을 한결같이 예법 (禮法)에 맞게 행하였으며, 16세:鯤.鵬 15세:訓.謹 14세:忠仁 13세:王父 전(磌)할아버지의 四代奉祀를 모시었다. 37세때 선조의사부 이였고 서울의 명유(名儒)로 알려진 윤명(韓胤明)선조께서 고양군(高陽郡)내산촌(萊山村)에서 시묘(侍墓)조상 무덤을 지키고 살았는데, 韓孝純 19세에 땔감을 지고가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 을 배우다. ※한효순(韓孝純)[1543~1621]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 양명학자 남시보(南時甫):남언경南彦經(1528중종23년~1594선조24년)은, 恥齊 洪仁祐(치제 홍인우의妹夫이며).韓胤明(한윤명)과는 처남매부 사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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