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zing HTML5 Audio Player, powered by http://amazingaudioplayer.com

 

先系 이야기
매화---조선전기
난초---조선후기
국화--外家
대나무---master
my story and that or what not

A!~~~MAEJOUNG!------한진휘 論

한윤명 이어서

관리자 2025.03.18 17:53 조회 수 : 65

配位: 貞夫人潭陽田氏父將仕郞 稔)상고 해 보아야할 것이다. 두문동72현 전귀생(耒隱,田貴生)의 후손으로 이때부터 정산 지역으로 낙향 세거한 望姓(명 망있는성씨)로 潭陽田氏 친정 아버지 전임:(田稔1561년明宗16년출생)의 曾祖父전구주(田九疇1491~1553)淸風郡守가 관직에서 물러나 정산지역에 낙향 하 여 일사정(一沙亭)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천내리 일대에 머물며 학문을 수양하고 은거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약 200여년 세월이 흘러 잊혀진 선계의 고향으로 돌아 갈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牙山縣監을 지낸 韓惟省의 子 ⁕(한윤명의 弟 韓胤宗의 손자) 19세(각:恪.乙酉生1585 고양목희리) 경기도 고양으로 귀향하여 世居를 이루었으며 손자 20세(치량:致良壬寅生1602 고양목희 리)때 까지 奉祭祀를 모시며 세거 하시다가 卒 하셔서 목희도에 영면해 계시며. 인조반정 이후 20세(치량:致良)할아버지의 配位高靈申氏(父申景涵1572)할 머니께서는 後嗣가 없었고 夫君別世後 홀로 경기도 고양에서 여주 금사면 도곡리 정착. 이때까지 鯤할아버지의 후손 사촌,육촌의 가계를 이루며 세거 하 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18세 한유상(韓惟翔)은 1622년에 사간원정언 임명 되었는데 이는 대북파의 지도자 이이첨에게 붙어 공론에 죄(廢母論)를 지은 데다가 이귀(李貴)가 역적을 보호 한다고 광해군에게 낭자하게 진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8세 한유상(韓惟翔) 字자익(子翼) 1578년 무인(戊寅)宣祖11년 生이며 고양 죽원리(한자소리:竹院上牌里.우리말:대굴원) 거주 하였다가 光海君8년(1616) 병진(丙辰)大增廣試 乙科때에는 한양에 거주 한걸로 보여진다. 父親은 通政郡守전행양근군수(前行楊根郡守) 韓胤寬(한윤관)이다. ⁕癸亥靖社錄1623년 (未詳) 反正時宰執銓曹三司及堂上實職堂下淸職改正座首 1623년(인조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파 들에게 정언(正言)한유상(韓惟 翔)13일 체포,十三日逮捕遠竄 뒤에 함안(咸安)으로 유배되었고, 1628년(인조 6)에는 단천(端川)으로 정배되었다. 후에 17세 韓胤光(한윤광의子) 한유길(韓 惟吉),(1568년생 무과 급제자로 경기 고양 출생) 광해군의 지지를 받던 북인세력이, 남인세력과 서인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유효립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공:珙)을 임금으로, 광해군을 상왕으로 추대하는 반정을 도모 하였다. 한유길(韓惟吉),등 거사를 함께할 동료들과. 50여명 1628년 1월~1629년 12월 처형된 것이다. 가문의 피화와 참화 속에 1627년丁卯胡亂과1636년丙子胡亂을 거치며 嫡孫 韓憬의 세계는 담양전씨妻家인 청양으로 세계를 이루었으며 작은집 은 경기도 여주로 이거 하여 여주,양평 문중을 이루게 된 동기 이다. 그러나, 전에 조부이신 한윤명*韓胤明)은 정여립을 일컬어 當今大儒(당금대유)와 같다고 소개했다. 선조시대에 양명학에대한 배척이 양명학은 기존 질서 에 안주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선학(禪學)이라거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양명학자인 남언경(아버지의 외 가)과 정여립의관계로 서극홍(徐克弘:한윤종韓胤宗의처남) 字임중(任重)계묘(癸卯)1543년 (중종 38) ※조선 광해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주 목사를 지 낸 홍매(洪邁)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 서극홍(徐克弘)의 딸이다. 일재 李恒선생의 문하에서 한유성과 交遊하며, 광해군 때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정 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推進하였으나, 인조반정(1623仁祖反正)으로 西人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 는 모반 사건으로 계속해서 남게 되어 신원복관(伸寃復官)이 이루어 지지않았다.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으로 歸鄕하지 못하고 처가인 청 양으로 입향하게 되었으며, 그후 인조 8년 경오(1630) 10월21일(丙寅) 한경(韓憬)을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삼았다. ※참고:평안도(平安道) 관할군현42관(四十二官)『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527]) 配位: 貞夫人潭陽田氏父將仕郞 稔)상고 해 보아야할 것이다. 두문동72현 전귀생(耒隱,田貴生)의 후손으로 이때부터 정산 지역으로 낙향 세거한 望姓(명 망있는성씨)로 潭陽田氏 친정 아버지 전임:(田稔1561년明宗16년출생)의 曾祖父전구주(田九疇1491~1553)淸風郡守가 관직에서 물러나 정산지역에 낙향 하 여 일사정(一沙亭)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천내리 일대에 머물며 학문을 수양하고 은거 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약 200여년 세월이 흘러 잊혀진 선계의 고향으로 돌아 갈수 없는 계기가 되었으며, 참의공파 嫡孫 충남 청양군 청남면 인양리 세거하여 집성촌을 이루 었다. 

             -15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한윤명 이어서 관리자 2025.03.18 65
42 청양 입향조 관리자 2025.03.18 75
41 •17세 韓胤明 - 관리자 2025.03.18 58
40 16세 韓鯤(한곤)...2 관리자 2025.03.18 54
39 한충인 孫 16세 韓鯤(한곤) 관리자 2025.03.18 57
38 한훈(韓訓) 관리자 2025.03.18 60


creat date 1996year~ south castle. All rights reserved.
record, paintings, images, and graphics and sound,or etc
maejoung spir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