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기(池勇奇, ?~1392) : 충주인으로 1378년 전라도 도순무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고, 1388년 이성계와 함께 요동 정벌에 나설 때 안주도 부원수로서 위화도 회군에도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심덕부·정몽주 등과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지용기는 처족 왕중의 아들 왕익부가 반역으로 몰렸을 때 그를 숨겨준 죄로 공양왕 3년(1391)에 곤장 100대를 맞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진도에 온 지용기는 지금의 지산면 거제리 앞 해변가에서 시를 읊고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내다 일생을 마쳤다. 『옥주지』에 보면 그가 진도에 유배 와 지내던 지산면 거제에 원정(院亭)을 짓고 살다 죽어 그 터가 ‘지씨원정(池氏院亭)’이란 이름으로 전해오며 뒷날 조선시대 중기 소재노수신(盧守愼)도 이 옛터에서 놀았다고 적고있다.
蘇齊 盧 守 愼 (1515--1590) 중종10--선조23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파직 순천을 걸쳐 진도로 유배되어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영상에 오르다. 노수신이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하셨다. 고려중엽 1125년 이자겸의 아들 공의가 조정의 첫 유배인물로 진도에 귀양오기 시작하여 조선 말엽 까지 60여명의 고관대작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곳에서 유배형을 당하다. 이렇듯 진도에 유배된 벼슬아치들은 학문이 깊고 권세도 있던 사람들이었다. 유배자중에서 정치적인 동정을 받던 인물도 있었고 노비를 데리고 오는 것이 허락되었고 가족의 동행이 묵인되기도 하고 현지에서 축첩과 生子를 허용되기도 했으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또한 없었으리라.
이처럼 대부분 유배자들이 진도에 귀양왔으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을 뿐, 불편없이 생활할 수가 있어서 이들의 한적한 시간과 소일거리는 시를 짓고 시조를 즐기는 정도라 이고장의 풍류가 발전하게 된것이다.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8 | [珍島郡誌에 의하면] | 관리자 | 2025.11.26 | 0 |
| 7 | 유배인의 기록을 통해 본 진도 지역의 민속문화 | 관리자 | 2025.11.26 | 0 |
| 6 | 삼지원(三支院)은 진도와 해남 사이에 | 관리자 | 2025.11.26 | 0 |
| 5 | 해남군 황산면 남리리에 있었던 역. | 관리자 | 2025.11.26 | 0 |
| 4 | [조선왕조실록 中宗時代] | 관리자 | 2025.11.26 | 0 |
| » | 지씨원정(池氏院亭? | 관리자 | 2025.11.26 |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