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산일면(黃一·山一面 조선 초·중기)
본래의 해남은 백제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고해남현, 죽산현, 황원군으로 분립된 행정체계였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하나의 영역으로 묶여지게 된다.
대체적인 지연적 동질성으로 해남을 기록코자 할 때 송지 일대와 계곡·옥천·북일·북평지역을 제외한 조선 초기 해남현을 그 모체로 보고 있다.
해남군이 독립된 단일 행정편제로 묶어진 이 시기는 변화는 왜구의 침탈로 부득이 해남 땅과 진도 땅을 합쳐 해남현으로 통합 편제한 결과였다.
이 시기가 태종9년(1409)이니 조선이 건국되고 변방과 해안지방은 아직도 상황이 불안정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또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세종대에 와서는 통합 되었던 해남과 진도를 분리시켜 원상을 복구하는 모습이다.
1448년 세종 30년에 우리면이 속해있던 황원군은 황원현(황산·문내·화원 일원)으로 격하시켜 해남현의 관할을 받게 하였다.
한편 해로와 인접한 우리 지역은 임진왜란 커다란 혼돈기를 맞았고, 임진왜란 이후 우리지역뿐만 아니라 조선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도래되어 조선후기 사회로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17~18세기의 사회는 바로 이러한 진통을 딛고 서서 새로운 이념과 행정구역의 일대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 행정구역
▶호구총수에 나타난 황일·산일면 (1789년 기준. 2面 70里)
현 소재지 ---황일면(30개리)
현소재지----산일면(40개리)
조선후기의 해남지역 면리체계는 임란 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여지도서(1759년)와 호구총수(1789)에는 우리지역 소속이었던 황일면과 산일면을 비롯해 현일면, 녹산면, 현산면, 산이면, 화일면, 화이면, 은소면, 마포면, 청계면, 북곡면, 장동면, 장서면의 16개면으로 나타나고, 우리 면에 해당하는 황일면은 현의 서쪽에서 40리에, 산일면은 서쪽 30리에서 70리까지 자리했다.
2. 환경
이곳의 성(姓)은 4개의 성씨가 있는데, 황(黃)·윤(尹)·송(宋-종宗)·갈(葛)씨가 거주했고, 이때 쯤 남리역의 기록이 보이는데, 현의 서쪽 35리에 위치 해 있으며, 왜구로 인하여 잠시 사라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건국 당시의 불안했던 남해안의 정세를 엿볼 수 있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고, 간전(墾田)이 6천 5백 4결이요,【논이 9분의 5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삼, 닥나무, 감, 밥, 석류, 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여우와 삵괭이, 물개가죽, 사슴뿔, 족제비털, 꿀, 밀[황랍黃蠟], 칠, 숭어, 전복, 표고, 분곽(粉藿), 석이, 죽순, 작설차, 지초, 비자, 자리이요, 약재(藥材)는 도아조 기름, 인삼, 속돌[水泡石]이요, 토산(土産)은 귤, 가는 대, 김[감태甘苔]이었다. 염소(鹽所 염전)가 3 곳이다.(세종실록지리지 1454)
제주로 가는 배가 머물렀다고 하는 성산 입암포와 현의 서쪽 60리에 위치하고, 삼기원(三岐院 삼지원), 지금의 옥매산은 화반석이 나오는 매옥산(埋玉山)으로 표기가 되어있으며, 황원리 망포에서 자연동(청동)이 생산됐다.
남리역에 대한 설명은 현의 서쪽 40리에 관리가 15명, 관노가 20명 말이 10마리가 있고 장흥 벽사역의 관할을 받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1481)
산수(山水)편에는 관자산(館子山)이 서쪽 30리에 길가의 작은 산이 돌기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은 관두산의 옛 이름이고, 옥매산(玉梅山)은 서쪽 50리에 있으며 산의 북쪽으로 도장사가 있는데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영로(嶺路)의 표시를 보면 입암포(笠岩浦)는 서쪽으로 50리에 있고, 제주로 가는 배가 머무는 곳이다.
도서(島嶼)로는 징의도(澄衣島)가 서쪽 30리에 있고 조수가 물러가면 연육이 되며, 입암도(笠岩島)는 서쪽 30리 벽파진 남쪽에 있다. 연자도(燕子島) 서쪽 20리, 4면이 석벽으로 육지와 거리가 수리인데, 모래를 모아 길을 만들었고, 연자호수가 있다. 양도(羊島)·고도(羔島)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장시로는 남리장 3일 3시(市)에 열린다. 역점(驛岾)으로는 벽사도(장흥)-가신-파청(보성)-낙승(나안)-양강(흥양)-진원-통로(강진)-녹산(해남)-별진(해남)-남리로 이른다는 기사가 나타나 있다. (대동지지 고종 1년 -1865)
여지도서(1757)에는 서산일면에 편호가 347호 남자 492명, 여자 552명, 관문 서쪽 50리에 황일면에 편호가 1661호, 남자 2171명, 여자 2639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일면은 그 당시 해남 16개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거주하는 대촌이었다.
산천의 기록편에는 옥매산은 금강산에서 왔다고 하며, 입암포에는 거인같은 입석이 솟았는데, 흰옷에 흰갓을 쓴 모습과 같다고 전한다.
또한 지금의 연기도에 대한 기록은 연자도라고 등재되어 있는데 현의 서쪽으로 20리에 있고, 사면이 석벽이고 주(州)와의 거리는 수리이다. 모래를 모아 길을 만들었으며, 연자랑에게 섬에서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 다시 연자랑을 보리라고 했다. 그런데 기다려도 기달려도 돌아오지 않아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사람들은 후에 그 섬을 말하여 연자각씨섬이라고 했다
6절 황원·산일면(黃原·山一面 조선후기)
고종대의 읍지(1871)에는 해남지역의 산일면이 산포일도로 현내·북곡·청계·마포·산포일도·산포이도·황원·장내·록산·화산·현산·은소면의 12개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글학회편 한국지명총람 해남군조에는 한말 행정개혁 이전에 모두 18개면이 있었다하여 여지도서와 호구 시수에 보이는 16개 면 외에 문내면과 관저면을 적고 있다)
1865년 5월 1일 전국적이 23부제(府制)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황일면(黃一面)은 황원면(黃原面)으로 개칭되었다.(1895년 개국 500년 5.26 칙령(勅令))
2. 환경
호남읍지(1895)가 발간 될 즈음 우리면은 산포일도면(山浦一道面- 서쪽 20리)과 황원면(黃原面)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이후 산포일도면은 정확한 내력은 없지만 황원면으로 개칭 되는 비슷한 시기에 산일면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현재의 관두산(冠頭山)은 관자산(館子山)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큰 길가에 작은 산이 툭 틔워 나와 있어 남리역(南利驛)사까지 5리이고, 무너진 성이 산을 감고 일어나 바다에서 끝났는데 지금은 법도가 무너져 백성들이 야금야금 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옛날 황원에서 말을 노아 먹이던 곳이다.(호남읍지) 과거 화원목장 이외도 우리지역에서 말을 방목하였던 곳으로 우항리와 남리역의 뒤편 마장터를 유력하게 꼽는데, 단종실록(단종 2년 1454)에는 전라도(全羅道) 해남(海南)의 황원곶이[黃原串] 목장은 말이 많이 번식하는데, 땅도 좁고 수초(水草)도 부족합니다. 장외(場外)의 입암곶이[笠巖串]는 본래 개간하지 아니하였고, 수초가 모두 흡족하니, 마땅히 부근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을 징발(徵發)하여 목장을 쌓고, 말을 방목(放牧)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옥매산(玉梅山)은 큰길가에 솟아올라 바다와 산 사이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데, 화반석이 생산된다. 돌은 옆으로 어지럽고 맑지 않으며 물소용돌이 치는 빛이 있다,. 도장을 새기는데 쓴다. 산위 바위사이에 폭포가 있다. 황원면 도장산송전(黃原面道藏山松田) 둘레 20리로 그 당시에는 큰 규모였을 알 수 있고, 입암포(笠岩浦)는 제주배가 머무르고 입석이 솟아 있으며, 높이가 10장이나 된다.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흰옷에 흰 갓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벽파진 아래 큰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다.
역원은 남리역과 더불어 삼지원이 소개되고 있는데, 삼지원의 원집(院宇)을 처음 만든 것은 벽파진 진머리였다.
관급서당으로 양사재(養士齋)가 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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