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羅右水營 城址
전라우수영성지는 기념물 제139호이며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 이다.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1440년 세종 22년에 해남 황원관으로 옮겼다가 1465년 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여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각수영의 폐지는 1907년이다.
전라우수영성은 16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다져 쌓은 내탁식 석성(內托式 石城)으로 평면 형태는 배 모양(舟形)에 가깝다. 위상에 걸맞게 4개의 성문과 옹성(甕城), 치성(雉城), 여장(女墻), 수구문(水口門) 등 다양한 부대시설과 십자(十字)형의 성내 도로망을 중심으로 관아건물과 창고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고 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2,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성은 둘레 3,843자, 높이 20자,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4개, 연못 하나와 우물 2개가 있었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 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1872년 지방지에서 본 전라우수영성의 모습으로 4대문과 함께 객사, 동헌, 창고, 옥사 등의 건물이 보이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비롯한 전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관사로서 26개의 각종 당청이 있었는데 중요 시설을 보면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선청과 집회소·회의장소로 사용된 12개의 누정이 있었다. 또 전라우수영성 남문 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의 항구 시설이 있었는데 군선으로는 전선 2척·귀선 2척·해골선· 방골선이 각 1척· 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 여기에 사부· 화포수· 타공· 웅고· 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다. 수군절도사는 무관 정3품이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명량대첩을 거두었는데, 명량은 본영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의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고을을 관할하였고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개 수군의 진을 거느렸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로 총괄했다가 그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김억추가 잠사 후임 우수사로 보임된다. 명량 해전 이후 김억추의 육상 전근으로 명량 해전에서 활약했던 안위가 이순신의 천거로 전라우수사로 임명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7관 12포이다.
속읍(7관)은 나주목(羅州), 영광군(靈光), 함평현(咸平), 무안현(務安), 영암군(靈巖), 해남현(海南), 진도군(珍島) 이고, 해남현 읍성 서쪽 67리에 우도수군절도사영(右道水軍節度使營)이 있었다. 현재의 해남군 문내면 일대이다.
속진으로는19진,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임치진(臨淄鎭) - 함평현의 서쪽 77리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금모포(黔毛浦)ㆍ법성포(法聖浦)ㆍ다경포(多慶浦)ㆍ목포(木浦)ㆍ어란포(於蘭浦)ㆍ군산포(群山浦)ㆍ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를 관할)
금모포영(黔毛浦營) - 부안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
법성포영(法聖浦營) - 영광군 북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다경포영(多慶浦營) - 영광군의 남쪽 1백 50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 수군만호.
목포영(木浦營) - 무안현에서 남쪽으로 68리 떨어져 있다. ○ 수군만호.
어란포영(於蘭浦營) - 해남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
군산포영(群山浦營) - 옥구현의 북쪽 22리에 있다. ○ 수군만호.
남도포영(南桃浦營) - 진도군의 서쪽 47리에 있다. ○ 수군만호.
금갑도영(金甲島營) - 진도군의 남쪽 30리에 있다. ○ 수군만호.
가리포진(加里浦鎭) - 강진현 완도에 있다. ○ 수군첨절제사.
마도영(馬度營) - 강진현의 남쪽 64리에 있다. ○ 수군만호.
회령포영(會寧浦營) - 장흥도호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 수군만호.
대동지지에 따르면 7관 18포이다.
속읍은 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진도(珍島)ㆍ영광(靈光)ㆍ해남(海南)ㆍ무안(務安)ㆍ함평(咸平)이고, 속진 법성포(法聖浦)ㆍ군산(群山)ㆍ고군산(古群山)ㆍ위도(島)ㆍ임류도(臨溜島)ㆍ고금도(古今島)ㆍ가리포(加里浦)ㆍ남도포(南桃浦)ㆍ금갑도(金甲島)ㆍ어란포(於蘭浦)ㆍ이진(梨津)ㆍ신지도(薪智島)ㆍ마도(馬島)ㆍ목포(木浦)ㆍ다경포(多慶浦)ㆍ지도(智島)ㆍ임자도(荏子島)ㆍ검모포(黔毛浦)이다.
광여도에서 본 해남읍성과 전라우수영성------ 전라우수영성을 보면 원문이 확실히 보이고 전라우수영성이 보이는데 성문이 5개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군병력과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07년에 일제가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기 위해 순종황제를 압박하면서 군대해산령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약 442년 동안 우수영은 조선의 서해바다를 지키는 군사 요충지였다.
조선 수군병력이 성곽을 쌓고 왜구의 침략을 감시하고 막아낸 곳은 문내면 우수영 서상리와 동외리에 걸쳐있는 나지막한 야산인 망해산(望海山)이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부터 망해산을 망제산(望帝山 또는 望祭山), 망태산(望泰山)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이 의미하는 역사의 흔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은 산 정상에 망해루라는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놓고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나, 수십년 전에는 정상에 봉화대를 쌓았던 돌들과 성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봉화는 해남 화원 일성산 봉화대와 무안을 거쳐 한양까지 연결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라우수군 전략표(경국대전)
우수군
대맹선----14척 수군1.120인
중맹선-----20척 수군1.200인
소맹선-----19척 수군570인
無軍소맹선-----54척 수군/
계 107척 2.890인
전라좌수영
인2.440척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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