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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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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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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해남 승려들

관리자 2023.10.05 11:24 조회 수 : 23

基弘 호는 용파(龍坡). 생몰년미상. 어려서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에 들어가 장선(壯善) 은사로 하여 삭발하였다. 침월(枕月)에게서 계를 받았고 성옥(性玉)의 법을 전해 받았다.그뒤 두륜산 북암의 운거(雲居), 달마산 중암의 응화(應化), 가지산의 동암(東庵) 등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응화(應化).

1813(순조 13)∼1885(고종 22). 조선 후기의 승려.

자는 심한(心垾), 호는 응화(應化). 17세에 달마산으로 출가하여 송월(松月)의 법을 이었다. 그뒤 시연(示演)·한성(翰醒)·대운(大雲) 등의 강백에게 불경을 배웠다.

학업이 성취된 뒤 대흥사 북암(北庵), 보림사(寶林寺) 서부도암(西浮屠庵), 송광사 보조암(普照庵)등지에 머무르면서 학인을 지도하였다. 그밖에 성도암(成道庵)을 중건하였고, 해인사에서 인경(印經)을 8회나 하는 등 교학의 유포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법을 이은 제자로는 두원(斗元)·두인(斗印)·화윤(華允)·상능(尙能) 등이 있다. 법맥은 시연―송월―유한으로 이어진다. 나이 72세, 법랍 57세로 대흥사 남암(南庵)에서 입적하였다. 남암에 부도가 있으며, 문집 1권과 일기 1권이 있다.

 

大雲

1830(순조 30)∼1868(고종 5). 조선 후기의 승려.

본관은 도강(道康). 성은 김씨(金氏), 자는 평운(平沄), 호는 한명(漢明). 선호는 설우(雪藕)이며, 대운은 법명이다. 추광(秋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14세에 출가하여 월출산도갑사(道甲寺)에서 회성(會成)의 제자가 되었으며, 경순(景淳)으로부터 구족계를, 그 뒤 각안(覺岸)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은사인 회성의 법맥을 이었다. 유일(有一)의 5세손으로 법계는 덕혜(德惠)-보언(保彦)-회성-대운으로 이어진다.

법맥을 이은 뒤에도 보림사(寶林寺)의 이봉(离峰)과 운거(雲居), 도갑사의 경순 등으로부터 선을 지도받았으며, 전라남도 강진군 보리산 수인사(修仁寺)청계암(淸溪庵)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나이 39세, 법랍 25세로 입적하였다.

 

월화강사(月華講師)

스님의 법명은 인학(仁學)이고 월화는 법호이며 성은 윤씨로 영암 사람이다.

일찌기 달마산으로 들어가 추담(秋潭) 스님 문하에서 머리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영담(靈潭)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월화스님은 명강백의 강당을 찾아다니며 교학을 배우고 선교의 법석을 돌아다니며 수행했다. 스님은 은사인 추담 스님의 법인을 전수받고 조사 벽해 스님의 법석을 물려받았다.

월화 스님은 청렴강직하고 부지런하여 밤이나 낮이나 쉬는법이 없었다. 스님은 가지산 보타에 주석했으며 소림에서 성장기를 보냈는데 소림이 어느곳인지는 확실치않다. 노년에는 주로 대흥사를 중심으로 북미륵암, 첨성각 등에서 주석했다.

스님은 조선 헌종 2년(1836)에 태어났으며 입적연대는 분명치 않다.

장선(壯善)[?~?]은 어려서 인근의 명산인 월출산에 들어가 자원하여 승려가 되었다. 침송 회성(枕松會聖)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문암(聞庵)에게서 법인(法印)을 전수받았다.

강론 방법에 조예가 깊었고, 그림 그리는 솜씨가 뛰어 났다. 화법(畵法)은 도현(道玄)과 원장(元章)의 기교를 본받았으며, 여러 불가 선지식들을 참방하면서 지혜를 배웠다. 표충사(表忠祠)의 수호 총섭(守護摠攝)을 역임했고, 보리산(菩提山)의 전좌(典座)를 맡기도 하였다.

원효사(元曉寺)·유마사(維摩寺)·수인사(修仁寺)·정관사(鼎串寺)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도갑사(道甲

寺)·대흥사(大興寺) 등에서 선지(禪旨)를 구하였다. 제자로는 남하 성연(南河性衍)과 환명 경운(煥溟敬雲)이 있다.

범어사 용파당대사 진영(梵魚寺 龍坡堂大師 眞影)은 불자를 손에 잡고 화면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용파대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용파당대사의 행적은 상세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말기의 승려로, 어려서 월출산에 들어가 침월(枕月)대사에게 계(戒)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통도사 영각에 봉안된 용파당 도주 선사의 진영을 통해 법명이 도주(道周)임을 알 수

있다. 또 범어사 용파당대사 진영 오른쪽에는 구봉(九鳳) 지화(知和)[1840 년대 활동]가 쓴 題贊이 있는데, 그는 1872년 통도사 금강계단 수축불사를 시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주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통도사에는 1878년 제작된 지화의 진영이 전하고 있어 이를 통해 용파당대사의 진영은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파당대사진영에는 19세기 후반 통도사 주지 및 금강계단 수축불사를 했고 1878년 제작된 진영을 남기고 있는 구봉당 지화의 제찬과, 진영의 바닥 돗자리 문양 및 의자, 불자의 표현법 등에서 19세기 후반 조성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1]

1648년 조성된 목조 불상으로 2001년 11월 7일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었다.

해남 도장사 본존불은 목조석가여래좌상으로 상의 높이는 109㎝, 무릎폭은 73㎝이다.

해남 도장사 본존불은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어 원만상이다. 귀는 큼직하게 어깨 위까지 내려와 있으며, 머리는 나발에 맨 꼭대기에는 육계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불상의 목에 표현된 3개의 주름]가 뚜렷하고 어깨는 둥글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감싼 옷자락이 허리 안으로 들어가는 변형된 우견편단이다. 무릎은 결가부좌(結跏趺

坐)를 취하였으며, 수인은 왼손을 미타정인으로 하고 오른손은 촉지인을 취하였다.

해남 도장사 본존불은 본존에서 복장물이 발견되어 순치오년무자(順治五年戊子)인 1648년 행사(幸思), 무염(無染) 등 12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 봉안처 사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해남 도장사 본존불 조성 시 수화승 행사를 제외한 11명이 무염계의 조각승인데, 무염계의 작풍은 거의 나타나지 않아 행사의 작풍으로 조성된 것

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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