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zing HTML5 Audio Player, powered by http://amazingaudioplayer.com

 

 
The Hans history-a
家門 小記
토지문기
hanskoso 이야기1
hanskoso 이야기5
my story and that or what not

A!~~~MAEJOUNG!------memory.....

황산 우항리 이 참판

관리자 2023.10.05 16:09 조회 수 : 35

 

다시 보는 해남 땅 구석구석1

작성자 우문동....://blog.naver.com/ijangzip

 

해남 판 ‘토지’의 무대, 황산 우항리 이 참판 댁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경남 하동 평사리 최 참판 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5대째 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만석꾼 최 참판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지나 해방이 되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토지’는 동학농민운동은 물론 근대사를 망라하는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를 기려 하동군은 평사리에 소설 속 최 참판 댁을 지난 2008년 실재와 같이 복원하고 평사리 문학관을 개관했다. 

 

해남 황산면 우항리에 이 참판 댁으로 전해지는 고가(古家)가 있다. ‘만석꾼’으로 한 시절을 호령했던 이 참판이 살았다는 곳이다. 평사리 최 참판이 소설 속 허구라면 우항리 이 참판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참판 댁은 해남 판 ‘토지’의 무대인 셈이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이 참판 댁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최 참판과 같은 만석꾼으로 격동의 구한말, 해남의 토호로서 그가 남긴 이야기는 ‘탈고되지 않은 전설’에 가깝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후손들은 모두 흩어지고, 고가의 주인마저 바뀌었으니. 

 

내가 이곳에서 ‘토지’의 최 참판 댁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런 귀결은 아닐는지. 사대부가의 마지막 자존심과도 같은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이 참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가벼운 현기증이 그 시절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인 이 참판과 고종

그렇다면 왕실의 종친인 이 참판 댁은 어찌하여 이곳 우항리에 터를 잡게 되었을까.

 

이러한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참판, 즉 남강(南崗) 이재량(李載亮, 1857~1938)이라는 인물의 가계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재량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9세손이다. 인평대군의 장자인 복녕군(福寧君)으로부터 시작해 양원군(陽原君, 장남)-여릉군(驪陵君, 차남)-명석(命錫)-병하(秉河)-동중(東重, 3남인 병택의 자로 병하의 양자로 입적)-심응(心應, 1822~1878)-재량으로 이어지는 종손의 가계다. 이는 고종 또한 복녕군의 직계라는 점에서 이재량의 가계와 매우 가깝다. 복녕군의 차남인 의원군(義原君)에서 안흥군(安興君, 장남)-진익(鎭翼)-병원(秉源, 차남)-남연군(南延君, 차남 채중(寀重) 후에 구(球)로 개명)-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4남 하응(昰應))으로 이어지는 가계다. 복녕군의 아우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은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환국(庚申換局)의 단초가 된 이른 바 ‘삼복(三福)의 변’에 연루돼 희생됐다. 이 때문에 복녕군의 가문은 손자대까지만 왕실 종친의 지위를 누린다. 그러던 중 영조 6년(1730) 나홍언이 경신환국으로 퇴출된 여흥군과 여릉군 형제를 추대하려다가 발각이 되면서 여릉군의 아들인 이명석(李命錫)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진도로 유배길에 오른다. 우항리에 정착하게된 것은 진도 유배길에 풍랑을 만나서라고 하나 당시 황산면 일대가 국영목장이던 진도 지산목장(1895년까지 운영됨) 소유인 관계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해도 현재 해남군의 상당부분이 진도군에 속했다. 

 

고종의 즉위는 흥선군의 와신상담의 결과였다.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상갓집 개’라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던 흥선군은 철종의 후사가 없자 왕위 결정권을 가진 헌종의 생모인 선정왕후 조대비에게 접근해 밀약을 받아낸다. 안흥군 이후 종친의 지위를 잃은 흥선군 가계는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이 사도세자의 4남인 은신군(恩信君)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종친의 지위를 회복한 상태였다. 

 

흥선대원군과의 만남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통해서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사 담당이셨던 여선생님께서 이 소설을 어찌나 재미있게 들려주셨는지. 하굣길에 서점으로 달려가 문고판으로 나온 책을 사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상갓집 개. 안동김씨의 서슬 퍼런 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흥선군은 비루한 처신을 감수했다. 오냐,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무너진 왕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대업을 꿈꾸는 수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그러자면 명당의 발복(發福) 만이 희망이었다. 나름대로 풍수를 공부하기를 10여년. 어느 날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온다. “충청도 예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명당이 있고, 홍성 오서산에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명당이 있는데 어느 곳을 택하시겠습니까?” 두 말 하면 잔소리. 흥선군은 서슴없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난다는 명당을 택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관을 따라 가야산으로 가 보니 가야사라는 절이 있고 명당자리에는 5층 석탑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주위의 산세를 둘러본 흥선군은 한눈에 대명당임을 직감하고 전율한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의 흥선군이라 해도 탑자리에 묘를 쓴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당시의 가야사는 수덕사보다도 큰 사찰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흥선군이 아니었다. 가야사의 중을 매수해 불을 질러 폐사로 만든 뒤 손수 나서 석탑을 허물고 기어코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다.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근에 보덕사를 짓는다. 가야사와 탑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였다.

그 후로 흥선군은 전국의 이름난 사찰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해 발복을 기원했다. 그러던 차에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한 흥선군은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이 우항리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길로 찾아 나선다. 멸문된 줄로만 알았던 양원군의 후손이 살아있다니. 어찌하여 왕실의 종친이 이 먼 천리 타향에 터를 잡고 산단 말인가. 우항리에서 12촌지간인 이심응을 만난 흥선군은 다시 한 번 대업을 향한 결의를 다진다.

 

이 참판의 아름다운 행적

마침내 철종이 승하하고 1864년 1월, 흥선군의 차남인 재황(載晃)이 보위에 오르니 이가 곧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高宗, 1852~1919)이다.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이 돼 섭정을 시작한 흥선군은 종친의 신원을 복권시켰고, 이재량 또한 대원군에 의해 고종 31년 8월 17일 辛酉 1894년 양호선무종사관에 제수 이어 남평 현감과 동부승지, 통정대부 등을 거쳐 마침내 광무 6년(1902) 가선대부 참판에 오른다. 하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재량은 남강재(南崗齋) 서당을 열어 우항가숙(牛項家塾)이라 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재량은 해남읍의 부호 민영옥, 김익준과 지금의 향교에 사립학교인 미산보통학교를 설립한다. 학생 7명으로 출발한 미산보통학교 초대교장은 이재량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으로 설립인가가 취소되지만 이듬해인 1911년 같은 장소에 해남공립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개교를 한다. 해남 동초등학교의 시작이었다.

이밖에 지역유림의 강학에도 영향을 끼쳐 해남읍 용정리 오충사(五忠祠)의 사적기를 지었으며, 일설에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인근 남리역의 대접주였던 김신영에게 거액의 거사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황산면사무소에서 우항리 공룡화석지로 들어가는 양 옆으로는 모두 바닷가로 이재량이 간척사업을 한 곳이다. 관두마을에서 병온리 쪽으로도 그가 간척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우항리 일대는 거의 대부분이 이 참판 댁의 전장으로 소작인들에 대한 구휼은 물론이려니와 1907년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국채보상소를 설립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재량이 1938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행렬이 무려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우항리 삼성동에 있었는데 부친묘와 함께 후손들이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선산으로 이장해 갔다고 하며, 1960년대까지 남아 있던 후손들도 하나 둘 떠나면서 현재 해남에 남아 있는 후손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해남 풋나락’이라는 말의 유래

그러나 이 참판 댁과 관련한 부정적인 이야기도 전해온다. 세월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진도 맹골수도 주위로 동·서거차도(巨次島)가 있다. 동거차도는 서거차도에 비해 면적이 넓지만 배를 대기가 나빠 배를 가진 예전 사람들은 주로 서거차도에 살았다. 동거차도는 서거차도보다 면적은 넓어도 논은 없고 밭만 있을 뿐이었다. 이재량의 아버지 이심응은 당시 전남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진도 조도 일대의 섬들마저 모조리 이심응의 소유로 만들어 줬다. 그런데 이재량의 아들인 이환용(1893~1945)이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는지 소작인들은 소작료로 설익은 나락을 냈다. 이를 목포의 정미소에서 도정을 했는데 풋나락이었던 탓에 하나같이 불량미의 대명사가 되면서 ‘해남 풋나락’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한 서거차도에는 소작료로 수확의 절반을 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참판 댁은 짚은 물론 떨어진 검불에도 벼이삭에 나락이 있다는 이유로 반으로 나눠 가져갔다. 이로 인해 조도 일대에서는 지나치게 계산적일 때 ‘해남 이 참판네 검불 챙기듯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러한 이야기는 섬 지역을 관리하던 농감인 마름의 횡포가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환용은 말을 타고 나들이를 다녔을 정도로 한량기질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거친 파도를 감수하고 섬에를 갔을 리는 만무하다.

 

전남 제일의 땅 부자

일본농무성농업종합연구소에 1930년도 전남지주조서가 있다. 이 조서에 따르면 당시 전남의 10대 조선인 지주는 해남 황산의 ①이환용(李桓鎔·2530정보) ②강진의 김충식(金忠植·1215정보) ③순천의 김종익(金鍾翊·1127정보) ④동복의 오자섭(吳子攝·893정보) ⑤장성·부안의 김경중(金暻中·819정보) ⑥해남의 윤정현(尹定鉉·829정보), ⑦동복의 오병남(吳秉南·806정보) ⑧광주의 현준호(玄俊鎬·713정보) ⑨담양의 국채웅(鞠採雄·653정보) ⑩고흥의 김상형(金相亨·632정보) 순이었다.

 

이밖에 목포의 문재철(在喆)은 608정보, 8만석 부자로 알려진 보성의 박태규(朴泰奎)가 239정보, 해남의 천선방(千善方·538정보), 담양의 정용준(鄭容駿·631정보), 화순 도곡의 고성운(高聖運·511정보) 등이 현지에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같은 시기 전남에서 500정보 이상 일본지주는 동척(東拓·9131정보), 동산농업(東山·2084정보), 전남식산(全南殖産·934정보), 다나카 농장(田中·709정보), 담양의 하소가와 농장(細川·627정보), 오오이케(大池·548정보) 송정리 도쿠가와 농장(德川·525정보) 등이다.

 

이같은 자료에 비춰볼 때 이 참판댁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나 짐작이 가능하다. 1정보가 3000평임을 감안하면 2530정보는 759만 평이 된다. 2위(364만5000평)의 두 배가 넘는 것으로 가히 전남 제일의 땅 부자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 격렬했던 소작쟁의의 대상지주가 한국인 지주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소작제는 반작이라하여 수확량을 절반씩 나눴으나 일제침탈자들이 한국지주로 진출한뒤 수리시설을 개선하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공급하면서 수세와 비료대, 농약대, 개량미종자대 등을 소작인들에게 부담시키자 소작인들의 반작차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인지주들도 일본지주들의 소작제를 흉내 내면서 농민의 저항은 한국인지주들에게 집중됐다. 당시 농민투쟁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일본지주에 대한 저항기록은 별로 없다. 이 때문에 일제하 한국인 지주들만 악덕으로 몰린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당시 소작인들의 투쟁결과 한국인지주들은 50% 소작료를 40%로 낮춰준 이들이 많지만 지역에 따라 농사법개량에 따라 수확량이 늘자 수확량의 절반을 소작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수확량이 적던 시절 소작인에게 주던 양만을 주고 증산된 곡식을 거둬가는 지주들도 있어서 전체수확량으로 따질 때 70%까지 가져가는 꼴이 되면서 수탈지주의 지탄을 받는다.

이들 전남의 지주들은 광복 후 실시한 토지개혁 때 땅은 소작인들 차지가 되고 땅값대신 지권(地券)을 받았으나 이 시기가 6·25 혼란기라 지권이 제값구실을 못하고 겨우 생계유지에 이용되어 새로운 기업 자본에 흡수되지 못하면서 몰락의 길을 가고 말았다.

 

솟을 대문으로 남은 영락한 고가

지금 황산면 우항리에 있는 이 참판 댁(정명식 가옥, 전남도 민속자료 8호)은 행랑채와 사랑채만 남은 모습이다. 고가는 소가 한가로이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 명당의 정혈인 소의 목(牛項)에 해당한다. 고가 앞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동백나무 숲은 개간 등으로 많이 사라졌지만, 이재량이 안산(案山)이 허약해 풍수적으로 조성한 비보림(裨補林)이다. 또 고가는 안채 보다 사랑채를 정혈에 맞춰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랑채 뒤로 안채와 사당 등의 건물들이 있었는데 6·25를 거치면서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 집주인인 정명식이 1968년 무렵 들어오기 전에는 안채 주위로 부속 건물이 48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영락한 고가의 솟을대문은 왠지 중국풍의 느낌이 난다. 그나마 볼거리는 솟을대문에 붙어있는 꽃문양의 문고리 쇠장석과 거북모형으로 깎은 빗장거리다. 장수(長壽)의 의미가 있는 거북모형 빗장거리는 조각이 살아있는 것처럼 매우 정교하다. 사랑채 방문 옆으로도 문짝을 고정시키는 용도로 쓰이는 거북조각이 눈에 띈다.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길게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줄행랑채다. 대문 바로 옆은 마굿간이 있었으며 그 옆으로 방과 곳간 등의 공간이 이어진다. 안채가 보통 여자들과 주인을 위한 공간이라면, 사랑채는 그 집안 식구의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자 보통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이곳 사랑채 앞에 서면 기둥의 주련과 방문 위마다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같이 낡고 퇴색한 모양새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상량문에는 ‘숭정기원후 5신미(崇禎紀元後 五辛未)’라는 명문이 있어 1871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1628~1644)의 연호다. 따라서 ’숭정기원‘은 1628년이다. ’5신미‘는 다섯 번째 돌아온 신미년이라는 뜻이다.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썼음에도 맹목적인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이미 망해 버린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 이 집의 주인인 정명식 집안은 이 참판 댁의 외가이다. 이 참판의 어머니가 정명식 집안인 동래정씨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유로 이 집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항리 이 참판과 읍호리 이 참판

이재량은 말년에 장손(해균)의 아호를 우사(又思)라고 지어준다. 자신이 죽은 후 만석에 이르는 재산을 모두 소진하여 낙심한 손자가 사사로이 목숨을 버리는 만약의 사태를 예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뜻에서였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던 이재량은 어쩌면 가문의 몰락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이 참판 댁은 만석꾼답게 자손들도 해남의 각지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분가해 나갔다. 현산면 읍호리에는 시인 심호(心湖) 이동주(李東柱, 1920~1979)의 증조부인 이재범(李載範)이 살았다. 이재범은 명석의 차남인 병영(秉泳)의 손자 기응(夔應)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명석의 3남인 병택(秉澤)의 손자 규응(奎應)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재량과는 8촌지간이다. 이재량과 마찬가지로 이재범도 음서(蔭敍)로 출사해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재범은 당대에 이재량과 더불어 해남의 ‘양참판(兩參判)’으로 불리며 5천석을 하던 부호였다.

 

그러나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 대부분이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해가듯이 ‘양참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재산이 줄어든 데다 전통적인 신분사회 또한 무너진 상황에서 지주들은 설자리를 잃어 간다. 신분사회에서는 토지를 기반으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려 재산 유지가 가능했으나 이것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점점 몰락해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참판 댁의 후손들은 그 많던 전답과 집과 선산마저 팔고 해남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읍호리에 세거했던 이재범의 후손 역시 마찬가지로 집과 모든 재산을 잃고 떠나갔다. 고래등같던 기와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엔 이동주 시인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서있을 뿐이다. 인생사 일장춘몽. 한 바탕 꿈이라기엔, 이들 가문의 몰락은 그저 ‘허무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양참판’ 가문의 이야기는 ‘토지’는 물론이려니와 최명희의 미완성 대하소설 ‘혼불’을 연상케 한다. 이들 가문이 몰락해 간 시대적인 배경이 ‘혼불’의 매안 이씨 종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더 극적인 이야기들이 이들 가문에 숨어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화무십일홍이런가?

 

이재량이 자주 찾곤 했다는 인근 내산 마을에 있는 도장사(道場寺)에를 들렀다. 마을 뒤쪽 깊숙한 곳. 보타산 자락에 자리 잡은 도장사는 이재량이 생전에 각별하게 지냈다는 내산마을 한 사과(韓 司果)를 만나러 갈 때 자주 들렀다는 절이다. 금호 방조제로 바다가 막히기 전에는 바다에 면한 풍광이 제법 괜찮았던 도장사는 인근 황산면과 문내면 출신의 중년들에게는 소풍을 갔던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벚꽃이 한껏 흐드러진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다소 옹색한 모습의 절집은 보수중인지 공사 구조물이 어수선하다. 공터에 차를 세우니 동백나무 군락이 눈에 띈다. 통째로 떨어진 붉은 동백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런가. 동백꽃의 낙화가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모를 번뇌를 염려한 나그네는, 서둘러 도장사를 뒤로하고 산문을 벗어난다.   

 

end----------------------------------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황산 우항리 이 참판 관리자 2023.10.05 35


creat date 1996year~ south castle. All rights reserved.
record, paintings, images, and graphics and sound,or etc
maejoung spir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