沃州二千言 --------노수신
나를 생각하고 형량을 줄여서 沃州에 귀양살이되었다. 성군의 은혜 하늘과 같아서 죽음을 면했다네. 잠시 동안 큰나무밑에서 쉬면서 장흥가는 길을 바라보았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어찌 근심하지 않으리오마는 벼슬이 중한지 이제 알았구나. 넓고 넓은 바다는 한없이 커서 하늘과 닿아 어느곳이 끝인가? 눈을 씻고 저 멀리 바라보니 한점 흰구름은 엎어진 술잔과 같구나.
온 포구는 왜놈들이 발동하여 피에 젖었고 석가래 사이에 詩두편 걸려있어 읊으려니 목이 먼저 메이구나.
어부의 노래에 저녁노을 찿아드는데 주막이 없어서 어느 곳에서 술을 사올가.
오른편으로 우수영을 바라보니 작은 움막들이 언덕을 의지하고 있어 사람들이 이르기를 흩어진 군졸들이 살고자 꼴(소먹이는 풀)을 베어 위장하였다던가--
안개 사이에 죽순이 올라오고 이슬속에 고운 연꽃이 피었구나 대나무는 푸른 이끼에서 춤을 추고 산돼지들은 소리내어 우는구나 . 갈길이 멀어서 돌재를 넘어서니 길이 또한 험악하구나 희미하게 저녁연기 서려는데 높은 언덕에 六, 七家屋 걸려있고 서너구루 나무도 서있네. 황혼이 깊어지니 초라한 집에 투숙하고 남쪽 마을에 들어서니 때는 閏九月이다. 더웁고 서늘함이 서로 바뀌었는데 나의 기운이 이다지도 빠져 봄철에 피곤함과 같아서 눈언저리가 매양 꺼꾸려 지려는듯 하고 다리가 피곤하여 때로는 무릎으로 헤메니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어 괴이하게 여기네. 나를 서리맞은 갈대와 비유하듯 온돌방을 찻아 쉬어가라 하네. 팔자문 돌저구에 노끈이 달렸고 발밑에는 지내가 밟히며 머리에는 거미줄이 걸치니 이게 바로 지옥인가 싶구나. 대닢으로 방을 쓸고 부드러운 버들로 자리를 삼았다.
유언비어 떠돌아다녀도 물을 곳이 없으며 온 고을은 흉년이 들었는데 의복으로 밀겨를 바꾸고 사나운 병에 걸려드네 전답에는 쑥풀만 무성하니 모두가 구렁에 빠져 있구나.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서로 붙잡고 다니니 애처러워 싸리문을 닫았고 어린아이 우는 소리 처량하게 들리는데 이 목숨은 남아있어 마시고 먹는다.
복숭아 꽃은 피었다가 시들어 지고 구름과 안개는 저절로 오가는구나. 나무 가지에 새들은 즐겁게 울고 새벽에는 뒤에서 여우가 부르짖는다. 등불이 밝으니 장롱속에 비단인듯 어두운 반달은 활모양 이로세. 아홉길 쌓은 탑도 한삼태기 흙이 모자라 무너지는데 . 땅이 움직이니 기둥이 흔들흔들 귀신이 나타났을까 의관을 바로쓰고 엄숙히 앉아서 아침을 기다릴제 백가지 감회가 솟아나누나.---
蘇齊 盧 守 愼 (1515--1590) 중종10--선조23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파직 순천을 걸쳐 진도로 유배되어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영상에 오르다. 노수신이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하셨다. 고려중엽 1125년 이자겸의 아들 공의가 조정의 첫 유배인물로 진도에 귀양오기 시작하여 조선 말엽 까지 60여명의 고관대작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이곳에서 유배형을 당하다. 이렇듯 진도에 유배된 벼슬아치들은 학문이 깊고 권세도 있던 사람들이었다. 유배자중에서 정치적인 동정을 받던 인물도 있었고 노비를 데리고 오는 것이 허락되었고 가족의 동행이 묵인되기도 하고 현지에서 축첩과 生子를 허용되기도 했으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또한 없었으리라.
이처럼 대부분 유배자들이 진도에 귀양왔으면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을 뿐, 불편없이 생활할 수가 있어서 이들의 한적한 시간과 소일거리는 시를 짓고 시조를 즐기는 정도라 이고장의 풍류가 발전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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