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韓氏 始祖 韓 蘭 1세
삼한을 통합한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벽상공신삼중대광에 오르심.
충북 영동 황간 구 토란리(일명 란곡리, 토란리 또는 토한리)에서 탄생하시어 청주 방정리로 이주하신 후 만석의 부를 쌓아 고려 태조 견훤이 정벌을 나갈 때 장검을 차고 출영하여 고려의 개국 공훈이 되시었다.
墓청주에서 시오리 떨어진 남일면 가산리에 있으며 배 송씨와 합장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실호 되었다가 충성공 한명회가 찾아 내어 단을 설치하고 제를 올려 왔으나 여러 전쟁과 병화로 몇 번의 거듭되는 실호와 존득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선조 때 후손 백겸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단을 세우고 준겸이 글을 써 비를 세웠다.
그후 세일제와 많은 후손들이 제전을 늘리고 무농정을 중건하고 신도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무농정 세일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봉행한다.
위양공 휘. 란(威襄公: 諱. 蘭)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시조(始祖)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태생으로 지원(諱. 智原)의 三子요 그 선계(先系)는 기자(箕子)로부터계출하였다. 공은 중년(中年)에 청주 방서동(淸州方西洞) 에 이거(移居) 하였다
.태봉왕 궁예(泰奉王.弓裔)가 죽고 왕건 태조(王建 太祖)가 918년 6월 15일 철원(鐵圓:鐵元)에서 즉위(卽位) 하는데 공의 공(功)도 있었다고 전한다.
태조(太祖) 2년 10월 배현경(裵玄慶) 이 평양(平壤) 에 축성(築城) 하는 이점(利点)을의논 하니 왕(王)이 한 란(韓蘭) 과 염상(廉湘) 에게 영(令)을 내려 현지에가서 독려케 하였다,
염상이 중도에 병이나서강윤형(康允珩)을 대신 보내 평양서을 완성케 하니 태조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후 청주 방서동에 내려와서 수년동안 농사를 지며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農土)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었더니 태조11년(928)후백제 견 훤(甄萱)을 치러갈 때 정벌군(征伐軍)에게 군량미(軍糧米)를 대주고 종군 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삼중대광 벽상공신 (三重大匡開國壁上功臣)에녹훈(錄勳) 되었다.
벼슬은 문하태위(門下太尉)에 올랐으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시조부군 휘. 란(威襄公: 諱. 蘭)의묘(墓)는 배위(配位) 송씨(宋氏)와 합조(合兆)이다.
가산(駕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이며 속리산이 갑방(甲方.正東(정동)에서北(북)으로15도의 방위(方位)를 중심으로 한15도안의方向)인고로 이르기를 회룡고조(會龍顧祖:山의地脈이뺑돌아서本山과 맞섬) 라 하여 길지(吉地)라 한다.
중간에 실호(失護) 되어 추모(追慕)하는 후손들이단(壇)을 쌓고 비를 세워 세일제(歲一祭)를 받들기도 하였다.잘못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고 자손이 있으면 반듯이 조상을 찾게 마련이다.
숙종 14년(1688)묘하(墓下) 에 고용되던 한모(韓某)가 탐문한바 그동네에사는 모인이 공의산소를 파헤치고 묘갈을 동강내어 우물바닥에 묻고 산소 전후면에 투장(偸葬) 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후손 성헌(聖憲)에게 고하니 성헌이 다시 청주병사 근(根) 에게 제보 하여 조사한 바 중절(中絶)된비(碑) 의 자획(子劃)이 완연함에 공묘임을 확인하고 이듬해 후손 성우(聖佑) 형, 숙(塾) 등이 제소 하여 확인을 얻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지석(誌石)이 발견 되어 다시묻고 개봉축 (改封築)하여 표석(表石)도 세웠다
묘비는 숙종 30년(1704)에 개수(改竪)하고 신도비(新道碑)는 영조44년(1768)에 세웠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제72호이다. 비문은 후손 좌의정 익모(左議政 翼暮)가 짓고 형조판서(刑曹判書) 광회(光會)가 썻으며 한성좌윤 덕필(漢城左尹 德弼)이 전(篆)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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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淸州韓氏 始祖 韓 蘭 1세 | 관리자 | 2023.09.03 |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