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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문중---한진휘님의 글

관리자 2024.03.15 10:29 조회 수 : 8

금화문중

 

◉14세 한충의(韓忠義)

庚戌1430년推定 세종12년~ 墓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형호리 형촌(衡村) 뒤 언덕에 있다.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사위(壻) 金克愧.申善甫.金習이다.

15세 한백(韓伯)己巳1449년推定 세종31년~ (한백(韓伯):墓는 호명면 내신리 신당 아찬산(神堂阿餐山)에 있다.(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子:한학(韓鶴:啟功郎會寧敎授1470년생推定).동반관계(東班官階)종7품계공랑(啓功郞). 사위(壻): 박수위(朴守緯). 박빈(朴蘋1487-1563 字 는 蘋之).

 

1495년(연산군 1) 10월 8일 장령 이자건(李自健)이 왕에게 아뢰기를, "한충의는 드러난 직위에 서임함이 부적당합니다."라고 탄핵을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후 1498년 무오사화 한백(韓伯)사촌 형 한훈(韓訓)이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의 묘제의(廟制議)를 송나라 인종(仁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백세불천지주(百世不遷之主) 로 할것을 기초 (起草)한 사건에 연루되어 이성(利城)에 부처(付處)되었으며. 연산군 9년(1503 계해년(癸亥年) 무렵, 용가방 우두머리(首龍哥榜)사회가 혼란 한 틈을 타서 불량한 무리들이 종루에다 용가방(龍哥榜)이라는 방을 붙였다. 이 때 한충의(韓忠義)가 장안에 살았는데 歲數73세 였으며, 그의 아들 한백(韓伯)과 함께 이름이 오르니, 한백이 부친을 만나자 물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탄식을 했 는데, 오익념(吳益念)이 근래 무뢰배(無賴輩)들이 인물을 평론하여 종이에 이름을 써 붙이고 ‘용가방(龍哥榜)’이라 하니, 익명서(匿名書)를 전파시킬 수 없도록 법을 거 듭 밝히기를 청하였는데.[출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8년, 임술년(壬戌年), 1502년12월8일.불명예로 여겼다.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1일 한훈(韓訓)소릉(昭陵) : 문종비(文宗妃) 건의 한 일로. 할아비 및 아재비·조카는 비록 죽었더라도 모두 부관 참시(剖棺斬屍)하라 이 일은 율문(律文)에 없는 형벌로 다스린다. 하여 15세 한백(韓伯)선조께서 55세즈음 父親 한충의(韓忠義)丈人 琴以詠이 조선세종 때, 경북 예천 호명면 월포리 우리개 (愚浦里) 살았는데 妻家인 이곳으로 避禍하여 세거 하였다.

◾집안의 滅門을 피하기 위해 妻家琴以詠 世居地와 사위(壻)신선보(申善甫) 경상도 예천 월포리 洞界에서 豊山으로 넘어가는 언저리 골짜기에 살았는데 경상도 예천으로 이주 하여 세거 하였으며, 예천군지 에 한충의(韓忠義) : 호명면 월포리 우리개 우포리(愚浦里) 사람, 자는 국이(國耳), 본관은 淸州,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경북 예천군 호명면 월포리 우리개(愚浦里) 살았는데 갑자사화 에 피화 한충의(韓忠義)세거하여 살았다.

 

◾한충의(韓忠義)사위(壻)신선보(申善甫)피실, 직곡(稷谷)에서 살았다.○墓稷谷同原失傳,아주신씨교수공파. 열 두 피실이 있다고 하는데 월포리 洞界에서 豊山으로 넘어가는 언저리 골짜기마다에 마을이 있어 피실 또는 稷谷이라 불리고 있다. (안동예천경계지역) 또 이 고장이 가뭄을 많이 타는 곳이라 피농사를 짓고 살던 마을이라 하여 피실이라 불렀다.[출처]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직산리 [稷山里, Jiksan-ri] ▪

신선보(申善甫)는 妻家 가까운 예천 직곡에서 세거하여, 선보는 인품이 온화해서 고을 사람들이 선인(善人)이라고 칭송하였다.潛庵先生逸稿(잠암선생일고) 그는 훌륭한 재주를 가졌지만 오랫동안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높은 관직을 얻으려고 조급증을 내지는 않았다. 고을 사람들과 친척들은 그가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안동향교(安東鄕校) 향록(鄕錄)12월에 작성 前敎授 申善甫 老 올라있다. 鵝洲申氏 신시생(申始生)이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의 정사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신개보(申介甫) 때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의 상리동 일대로 옮겼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위(壻)김극괴(金克愧)世祖 丙戌1466년 출생【김극괴는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1415 ~ 1480)의 아들이다.】 配;淑夫人淸州韓氏 副護軍 僉知中樞府事 忠義의 따님으로 光山金氏 夫君김극괴(金克愧) 出嫁 하여 生二男낳았으며 충남 논산군 양촌면 명암리 墓:雙墳이다 - 12 -

◾손자 16세 한학(韓鶴)선조는 配位 延安金氏 澍 영안도(永安道)啓功郎會寧敎授를 지내셨으며 그후 1504년 父親15세 한백(韓伯). 14세 祖父한충의(韓忠義) 禍를 피해 경북 예천으로 이주 하였고 16세 한학 할아버지께서는 34세때 즈음 妻家인 금화군 서면 수유리 에서 세거 하시다가 근북면 두촌리로 이주 20세 한주석(韓柱石)1586년宣祖19년 까지 120년간 淸州韓氏叅議公派 집성촌을 이루어 오성산 앞 평야에 그어진 휴전선을 가로지르는 근북면 두촌리와 율목리 옛 근북면사무소가 소재한 두촌리에 세거 하신 선조님의 생활 모습이 아른거리며 한탄강이 근처에 있으며 세속 을 이어 왔나 사료 된다. 현재 북한령인 오성산 자락에 있는 남한령 법정리. 북한 측의 비무장지대이자 과거 근북면 소재지였던 인근의 두촌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었다. 한백(韓伯)의 사위 박수위(朴守緯).박빈(朴嬪) 홍귀달(洪貴達)1438(세종 20)-1504(연산군 10), 용궁현(龍宮縣) 예천 용문면 죽림리 출신으로 그의 아들 홍언국1470년생과 예천에서 妹弟인 朴嬪과 수학 한것으로 보인다. 1506년(연산군 12) 2월에 거제 구금장(拘禁場)으로 도로 귀양 김세필(金世弼), 박수위(朴守緯)는 신과 울타리를 두고 서로 이웃하고 조석으로 상종하였으며 사냥에 관한 연 루자도 경차관(敬差官)을 추고(推考)하게 하여 두 차례나 형문하였으나,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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