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족보敦寧譜牒기록
단경왕후 외가 忠仁系 記錄 鯤의嫡長子宣祖師傅 胤明丙戌1526중종21년. 胤宗戊子1528중종23년. 胤寛壬辰1532중종27년. 胤光甲午1534중종29년. 胤善戊戌1538중종33년. 女:阿只壬午1522중종17년(趙應慶)出嫁 이다.
楊州松山덕계리에서 세거 하였는데 父親 趙傅(조부) (己卯與諸兄並薦賢良禍作同被坐罷坎坷以卒)1519년(중종 14)기묘년, 현량(賢良科)에 등용 여러 형들과 현량과는 신구세력(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격화시켜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와 더불어 기묘사화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 화가 미치 죽었다.
⁕계후[ 繼後 ] 후사(後嗣)가 없는 자가 양자(養子)를 두어 자신의 뒤를 잇게 하는 것. 조선 시대에는 양자를 얻고자 할 경우 예조(禮曹)에 정장(呈狀)을 올려 입안(立案)을 발급받아야 했음. 양자로 입적하는 사람은 동성(同姓)으로 한 항렬 아래인 사람으로 정하였음. 宗法의 확립과 함께 세종대에 士大夫家의 養子立嗣에 관한 大綱이 제정되었고 經 國大典에서 법제로서 확정되었다. [유사어] 입후(立後). 계후 [繼後]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양자(養子) 양부와 양모는 친자를 출산하기 위해서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였을 때 첩자와 지자 순으로 관의 허락을 받아서 비로소 입양하였다. (嫡妾俱無子者 告官立 同宗支子爲後). 친부와 양부 간에 양자를 결정하고(兩家父同命立之) 실제로 행하였을 때 양부의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가장의 사후에 양모의 요청과 문중의 결정으로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다. 이는 가장이 가계계승자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비교적 이른 나이 혹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경우이다. 그 외에도 양모가 문 중에 양자들이기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럴 때 문장(門長)을 비롯한 집안 구성원은 양모의 양자들이기 요청을 동의로 결정하였다. 양부와 친부는 몇 가지 원칙 하에서 양자를 들였는데, 장자는 양자가 될 수 없었다.(단, 양부가 형이고 친부가 아우인 경우는 예외) 양자는 자신 이후에 득남하였다 하더 라도 장자로서 양부의 가계를 계승할 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친부의 가계를 계승할 자녀가 없으면, 양자는 파양되어서 다시 친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양자 [養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중종반정(中宗反正)후 중종1년(1506년9월20일)伸冤復官이 되면서 고양 목희도에서 韓訓선조의 묘 를 고양 내산으로 이장 하여 재 조성 하였으며 후계를 이었다. 정치적인 안정이 이루어진 중종,인종,명종조를 거쳐 선조대에 이르러 우리는 또한번 역사 사상 가장 처절했던 임진왜란을 경험하게 된다. 고양의 원주민은 여러 가지 여건상 고 향으로의 복귀가 어려웠다. 宣祖임금의 사부 윤명(胤明)할아버지께서 지석(誌石)기록에 의하면, 연산군때 안타갑께도 돌아가신 15세 훈(訓:1498년戊午士禍)할아버지와 아버지(父)14세 충인(忠仁:1504년 甲子 士禍)돌아가시게 됩니다. 중종의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따님이고, 신수근은 14세 충인(忠仁)의 사위 이며. 燕山君과는 妻男男妹 사이 이다. 그러나 훈(訓) 할아버지는 연산군의 폭정에 1498년 김종직의 조 의제문 사건때에 소릉복위(문종의비:현덕왕후권씨)묘를 보살피라는 충간을하다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1504년갑자사화(폐비윤씨:연산군생모)사건때에 모든 사림(선비)들이 폭정을 견디지못할 때, 14세 충인(忠仁)할아버지께서는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邊郡:가족이흩어 짐)으로 이사하여 살게하였으며, 모든책임을 지시고 사위인 신수근앞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때까지 장안[居長安]거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186~187번지로 장안이라 하여 평창동 중에서도 가장 큰 토착부락이었는데 도읍을 가리키는 말을 장안이라 한 것과 일 맥상통하며,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평창동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 성북구 정릉동, 동쪽은 성북동과 접하 고 있으며 한양 에서 거주 한것으로 사료 된다.
◾치마바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중종이 부인을 잊지못하자 부인이 자신의 치마를 이 바위에 걸쳐 놓아 보이게 했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즉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중종이 되자 그 부인 신씨(愼氏)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 守勤)이 반정 때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 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하며 반대하자 인왕산 아래 사직골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중종은 부인을 잊을 수 없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으며, 신씨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 바위에 걸쳐 놓음으 로써 간절한 뜻을 보였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신수근(愼守勤)庚午1450세종32 配:한은광(韓銀光)丁卯1447세종29년. 端敬王后1487(성종 18)∼1557(명종 12). 조선 제11대 왕 中宗의 妃. 外祖父 한충인(韓忠仁:1426~1504) ◾16세 한곤(韓鯤).한붕(韓鵬) 先祖의 이름(生諱) 이야기 곤(鯤)은 바닷고기의 이름으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에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어 그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고, 이 고기가 변화하여 붕(鵬) 이라는 새가 되는데, 붕새의 등 너비는 또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곧 사람이 물욕을 벗어나서 타고난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곤의 변화에 빗대서 한 말에 선조 의 生諱이다. 17세 韓胤明:丙戌1526生중종21년 선조사부 이항의문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이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변별(辨別)하는 잣대 중 하나는 그 사람의 벼슬에 나아가고 물 러남(進退)을 살피는 것인데 군자는 평소에는 도리를 닦다가 기회가 되면 벼슬에 나아가 백성(小人)들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일을 자신의 도리로 삼는 사람들이다. 김계선생의 묘갈명에 을사 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에 징계된 여러 노 선생(老先生)이 가끔 몰래 모여서 강의하고 글을 가르쳤는데, 공이 바로 기꺼이 그 문인(門人)이며 고제(高弟)인 한윤명(韓胤明) 과 종유(從遊)하자, 더러는 화(禍)의 빌미 라고 지목하였지만 못들은 사람처럼 하고서 날마다 반드시 모여서 토론(討論)하며 지조 유지에 더욱 힘을 썼다. 남계선생의 문집에 나타난 자(字)는 韓士冏 胤明 으로 나타났으며. (士炯:빛날형.으로쓰기도하고 빛날경)으로도 하였다. 호(號)는 坰菴(경암:서울에서멀리 떨어져 있는곳 들경(坰) 으로 도 썻다. 竹川(박광전)先生文集卷之七 문집에 보면 爲己之學(위기지학) <자기를 위하는 학문, 곧 도학>에 힘써, 坰菴(경암)韓胤明(한윤명)과 경전의 옛 뜻을 토론하며 힘써 학업을 돈독히 하였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율곡선생 제문에 문학이 영원히 흐르고 정주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기니 난초지초는 불에 타도 그 향기는 남는 것이다. 사림으로는 봄이 오기 직전 하나의 꽃망울과 같다 하셨다.(栗谷祭文畧曰沂流尋源日有功程蔚然芝蘭不焚自聲士林减春一片花零事載石潭日記) 明宗朝 윤명(胤明:선조사부)께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윤임(대윤)과.윤원형(소윤)의 소용돌이에(一齋일재李恒이항)호남지역인 문사들과 從遊하며 門人인(徐克弘서극홍:徐繪의子) - 10 - 윤종(丈人徐繪)할아버지와는 처남남매 이며 귀향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17세:윤명胤明.윤종胤宗.18세:유성惟省,유존惟存) 선조께서는 1561년 명종16년1월15일 겨울에 父親 鯤께서 天壽를 누리고 下世하시니 경기도 고양으로 귀향 하여 성빈(成殯)한 뒤에는 의복(衣服)과 침식(寢食)을 한결같이 예법(禮法)에 맞게 행하였으며, 16세:鯤.鵬 15세:訓.謹 14세:忠仁 13세:王父 전(磌)할아버지의 四代奉祀를 모시었다. 37세때 선조의사부 이였고 서울의 명유(名儒)로 알려진 윤명(韓胤明)선조께서 고양군(高陽郡)내산촌(萊山村)에서 시묘(侍墓)조상 무덤을 지키고 살았는데, 韓孝純19세에 땔감을 지고가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 을 배우다. ※한효순(韓孝純)[1543~1621]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 양명학자 남시보(南時甫):남언경南彦經(1528중종23년~1594선조24년)은, 恥齊 洪仁祐(치제 홍인우의妹夫이며).韓胤明(한윤명)과는 처남매부 사이 이다. 18세 韓惟省(한유성)庚戌1550명종5년推定~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며, 자는 창연(暢然)호는 송제(松齊)이다. 이일제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서극홍(중종38 1543癸卯生) 정근 과 친교하였다. 통훈대부 덕산현령德山縣令(선조22 1589년己丑正月到任~선조24 1591년辛卯辭遆德山縣邑誌)을 거쳐, 강서현령(동반외관직 종5품), 43세때 아산현감牙山縣監(宣祖26 1593년癸巳10월28일) 역임하셨으며, 配位는 南原尹氏 尹奎1515의 따님인데 驪州金沙面唐洞에서 세거 하였으며, 配位 南原尹氏의 祖母는 密陽朴氏(朴蘋)따님이며,(朴蘋)의 配位는淸州韓氏(韓伯1449:韓忠義의子)의 따님 이시다. 증 호조판서(정2품)를 제수 받으셨으며. 슬하에 두 아드님을 두시었다. 韓憬(한경).韓忭(한변)
종중 한진휘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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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1.22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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