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내용)
15세 韓 訓(한훈) 承旨公 甲子1444세종26년~戊午1498년연산4년8월10일
공(公)의 휘(諱)는 훈(訓)이요, 자(字)는 사고(師古)이며, 태위한란(太尉韓蘭)의 십사대손(十肆代孫)이시다.
증조부(曾祖父)의 휘(諱)는 영정(永矴)이시니, 증참의정행군수(贈叅議政行郡守)이시고, 조부(祖父)의 휘(諱)는 전(磌)이시니, 통정호조참의(通政戶曹叅議이시고, 부(父)의 휘(諱)는 충인(忠仁)이시니, 가선절도사(嘉善節度使)이시고, 모(母)정부인안동김씨(貞夫人安東金氏)는 지돈령부사 김중엄(知敦寧府事 金仲淹)의 여(女)이시며, 평양부원군 조대림(平壤府院君 趙大臨)의 외손(外孫)으로공(公)이 생(生)하시니 명 정통갑자(明 正統甲子)(1444년)에 재기(材器)가 일찍 이루어 지시고 학행(學行)이 모두 넉넉 하심으로 사류(士類)들이 흠모(欽慕)하였으며, 일시(一時)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종유(從遊:입에서입으로전해는말)하였다.
계모(繼母)이씨(李氏)가 성엄(性嚴:성품이 엄했다)하여, 모든 자녀(子女)들이 그 뜻을 맞추지 못하였으나, 공(公)이 홀로 능(能)히 그 기뻐하는 마음을 얻음으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공(公)의 나이 이십세(二十歲)가 넘어서 사마양과(司馬兩科)에 올랐으며, 또 성종말년(成宗末年)별시(別試)에 장원(壯元)하였으며, 연산(燕山)이 사위(嗣位:즉위)하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서 그 전복(顚覆)의 처음, 처사의 잘못에 논핵(論劾)을 피치 않았으며, 소릉(昭陵:端宗母의墓)복위사(復位事)를 건의(建議)하여 숨김없이 직언(直言)하므로, 군사(羣邪)들이 측목(側目:눈을 딴곳을돌림) 하고 혼주(昏主:연산군)가 깊이 미워 하므로, 좌천(左遷)되어 황해도사(黃海道事)로 나갔다가, 돌아와 소격서령(昭格署令)에 제수(除授)되었다.
무오년(戊午年)(1498년) 리산(理山:평안북도 초산)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사환(賜還:죄를사하여 돌아옴)되어 집에서 졸(卒)하시니, 목희도에 계신 외조모묘(木希道外祖母墓:목희도.당인리부근)곁에 장례(葬禮) 모시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중전(重典:엄한죄)에 빠지었고 그때에 내산리(柰山里:경기도고양시덕양구내유동선영)로 이장(移葬)하였다. 부인광주정씨(夫人光州鄭氏)는 현풍(玄風:경상도현풍)에 편예(編隷:종 으로 편입)되고,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邊郡:가족이흩어짐)으로 이사하여 살았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에 이르러서, 승정원도승지(承政院度承旨)에 추증(追贈) 되었고, 또 조카 소위장군부군 휘 곤(昭威將軍府軍諱鯤)으로 기후(其後)하고, 드디어 자손록용(子孫錄用:대를이음)의 명(命)을 내리었다. 부군생시(府君生時)에 양모(養母:양자간어머니)의 묘(墓)를 영차(塋次:선영先塋)로 이부(移祔:옮김)하고자 하셨으나, 로원력약(路遠力弱:길이멀고 힘이약함)하므로 결행(決行)치 못하시고, 지금 그 묘(墓)는 현풍(玄風)에 계시다. 부인 광주정씨(夫人 光州鄭氏)는 통훈대부행청도군수 정찬우(通訓大夫行淸道郡守 鄭讚禹)의 여(女)이시다. 부군(府君:母남평조씨)는 절교위 조공 휘 서(節校尉曺公諱瑞)의 여(女)이시니, 일녀오남(一女五男)을 낳으시니 여(女)는 한아지(韓阿只)夫조응경(趙應慶)에게 출가(出家)하였고, 장남(長男윤명(胤明),(次男윤종胤宗),(三男윤관胤寬),(四男윤순胤純),(五男윤선胤善)이며,증손(曾孫)은 약간인이다.
때는 가정계해(嘉靖癸亥1563년) 四月 日.
고애자(孤哀子:상중에아들을칭하는말) 윤명(胤明)은 대강 추록(追錄:기록)하여 지(誌)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