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입향조 牙山縣監을 지낸 韓惟省의 子 •19세 韓憬(한경) 宣祖13년(庚辰1580)推定~ 字汝吾號月亭順陵叅奉通訓大夫行軍資監主簿(仁祖朝蔭職)贈吏曹叅判. 墓:靑陽郡靑南面白隅洞亥坐有碣 配: 貞夫人潭陽田氏父將仕郞稔 墓:高陽先塋下. 入鄕祖家系의 嫡孫 公의 자(字)여오(汝吾)이며 號는 월정(月亭)이며 순릉참봉(順陵叅奉)통훈대부행군자감주부(通訓大夫行軍資監主簿)를 인조조에 음직(仁祖朝蔭 職)을 지내셨으며 증이조참판(贈吏曹叅判)을 제수 받으셨다. (韓憬(한경)할아버지의 장인(丈人전임(田稔1561년생~1592)은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중봉(重峯)조 헌(趙憲)의 의병은 근왕(勤王:싸움에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縣監 韓惟省)에 이르렀을 때 호남 지방을 - 12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을 때 휘하(麾下)에서 금산전투에 참전한 남평군수 한순(韓楯1555년생:韓致亨5代祖)과 고 경명의 의병군은 이미 패전하여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들어가 힘써 싸웠으나 전 군수 윤열(尹悅)등 금산전투에 남은 의병700명과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 (義)’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하고 양주산전투에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 하였다. 의병으로 전투에 참전 하기전 따님이신 담양전씨 當時13세(1579년생推定)와 아 들(禹平1581)을 두었는데 유서필지(遺書必知)를 통하여 중봉(重峯 趙憲先生)에게 말 하니 한양으로 올라가는 방어선에 아산현감 한유성에게 부탁하여 한경12세 (1580년생推定)定婚이 성립 되지 않았나 사료된다.(參考:한순韓楯과 한경韓憬 10촌) 혼례를 올리어 고양에서 세거 하셨는데 임진왜란(1592년)으로 아산 현감(牙山縣監1593 당시43세) 한유성(韓惟省)은 앞서 수령으로 있을 적에 몸에 병이 있어서 형세가 소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牙山縣監韓惟省,前爲守令,別無能稱,身且有病,勢不能堪任。請命遞差。(선조실록43권, 선조 26년 10월 28일 무신 1 번째기사) 1593년 퇴임후 "병세가 있어서 배위 이신 담양전씨는 할머니께서는 시부모 봉양과 아드님 이신 한치화(韓致和:1605년)출생후 때까지 시아버지 간병차 고양벽제에 계셨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성(惟省)선조의 사촌 형제 들의 율문(律文)으로 화를 당함(被禍)가 있었을 때, 경(憬)할아버지께서 홀로 아드님 치화 (致和)와 함께 청양 정산 천내리 담양전씨 처가로 피하여(避禍)오셨다. 전씨 할머니의 墓:高陽先塋下로 되어 있으나 실효 되었다.(宣祖師傅 한윤명 嫡孫) ⁕(한윤명의 弟 韓胤宗의 손자) 19세(각:恪.乙酉生1585 고양목희리) 경기도 고양으로 귀향하여 世居를 이루었으며 손자 20세(치량:致良壬寅生1602 고양목희리)때 까지 奉祭祀를 모시며 세거 하시다가 卒 하셔서 목희도에 영면해 계시며. 인조반정 이후 20세(치량:致良)할아버지의 配位高靈申氏(父申景涵1572)할머니께서는 後嗣가 없 었고 夫君別世後 홀로 경기도 고양에서 여주 금사면 도곡리 정착. 이때까지 鯤할아버지의 후손 사촌,육촌의 가계를 이루며 세거 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18세 한유상(韓惟翔)은 1622년에 사간원정언 임명 되었는데 이는 대북파의 지도자 이이첨에게 붙어 공론에 죄(廢母論)를 지은 데다가 이귀(李貴)가 역적을 보호 한다 고 광해군에게 낭자하게 진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유상(韓惟翔)은 함안(咸安)으로 유배되었고, 1628년(인조 6)에는 단천(端川)으로 정배되었다. 후에 17세 韓胤光(한윤광의 子) 한유길(韓惟吉),(1568년생 무과 급제자로 경기 고양 출생) 광해군의 지지를 받던 북인세력이, 남인세력과 서인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유효립은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공:珙)을 임금으로, 광해군을 상왕으로 추대하는 반정을 도모 하였다. 한유길(韓惟吉),등 거사를 함께할 동료들과. 50여명 1628년 1월~1629년 12월 처형된 것이다. 가문의 피화와 참화 속에 1627년丁卯胡亂과1636년丙子胡亂을 거치며 嫡孫 韓憬의 세계는 담양전씨妻家인 청양으로 세계 를 이루었으며 작은집 은 경기도 여주로 이거 하여 여주,양평 문중을 이루게 된 동기 이다. 그러나, 전에 조부이신 한윤명*韓胤明)은 정여립을 일컬어 當今大儒(당금대유)와 같다고 소개했다. 선조시대에 양명학에대한 배척이 양명학은 기존 질서에 안주 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선학(禪學)이라거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양명학자인 남언경(아버지의 외가)과 정여립의 관계로 서극홍(徐克弘:한윤종韓胤宗의처남) 字임중(任重)계묘(癸卯)1543년 (중종 38) ※조선 광해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주 목사를 지낸 홍매(洪邁)이며, 어머니 는 이천 서씨 서극홍(徐克弘)의 딸이다. 일재 李恒선생의 문하에서 한유성과 交遊하며, 광해군 때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己丑獄 事1589)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推進하였으나, 인조반정(1623仁祖反正)으로 西人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는 모반 사건으로 계속해서 남게 되어 신 원복관(伸寃復官)이 이루어 지지않았다.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으로 歸鄕하지 못하고 처가인 청양으로 입향하게 되었으며, 그후 인조 8년 경오 (1630) 10월21일(丙寅) 한경(韓憬)을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삼았다. 配位: 貞夫人潭陽田氏父將仕郞 稔)상고 해 보아야할 것이다. 두문동72현 전귀생(耒隱,田貴生)의 후손으로 이때부터 정산 지역으로 낙향 세거한 望姓(명망있는 성씨)로 潭陽田氏 친정 아버지 전임:(田稔1561년明宗16년출생)의 曾祖父전구주(田九疇1491~1553)淸風郡守가 관직에서 물러나 정산지역에 낙향 하여 일사정(一沙亭) 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천내리 일대에 머물며 학문을 수양하고 은거 하였다고 전해진다. - 13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약 200여년 세월이 흘러 잊혀진 선계의 고향으로 돌아 갈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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