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붉은 찔레꽃’ 정체성은 장미인가 찔레인가
매일신문에서 2024년5월30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가수 백난아가 부른 이 노래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향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노랫말은 백옥같이 하얀 찔레꽃을 보고 자란 당시 사람의 상식과 맞지 않았다. 붉은 찔레꽃을 가시가 총총하며 찔레와 비슷한 해당화로 추측했다. 지역에 따라 해당화를 '홍찔레'나 '때찔레'로 부르기 때문이다. 또 식물 분류가 명확하지 않던 시절 가시 있는 가지에 핀 꽃을 찔레꽃으로 뭉뚱그려 불렀을 개연성도 없지 않았다.
요즘 대구경북 지역에 붉은 찔레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붉은 찔레꽃' 논란은 의미 없어졌다. 대구 수성구 대구도시철도 3호선 황금역과 어린이세상역 주변의 범어천 제방에 붉은 찔레꽃이 만발하여 도심 하천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마을의 고택에도 붉은 찔레꽃이 활짝 피어 방문객들을 반기고 있다. 지경당의 대문 옆에 향나무와 어울린 붉은 찔레꽃을 향한 사진동호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또 진주댁 정원의 붉은 찔레꽃의 자잘한 수많은 꽃송이의 장관에 방문객들은 인증샷을 즐기는 모습이다.
붉은 찔레꽃의 이름이 궁금해서 매원마을의 지경당과 진주댁 정원을 손수 가꾸는 주인 이수욱 어르신께 문의했더니 "30여 년 전에 계룡산에 등산 갔다가 산골 할머니로부터 구매해 마을에 처음으로 보급하여 지금까지 가꿔왔다"며 "이름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혹시 원예종으로 육종된 품종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토종 아니면 산골 할머니가 팔 리가 없지 않느냐?"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매원마을과 범어천의 붉은 찔레꽃잎의 가장자리는 분홍보다 진한 붉은색에 가깝고 중심으로 갈수록 분홍색으로 엷어지다가 가운데 쪽은 흰색을 이루는 그러데이션 톤이다. 꽃술은 흰 찔레꽃과 마찬가지로 노랗다. 줄기의 잎사귀 7장은 하얀 찔레나무보다 가장자리에 톱니가 날카롭고 크기도 확연하게 작다. 꽃차례나 나뭇잎 형태로 봐서는 요즘 시중에 나오는 국경찔레와 매우 닮아있다.
붉은 꽃이 피는 찔레나무와 비슷한 종을 찿아보니 국가표준식물목록에 국경찔레가 있었다. 정녕 압록강 연안에 분포하는 국경찔레가 맞는가? 대구 도심 범어천을 관할하는 수성구청에 품종을 문의하니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국경찔레로 알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상품 이름이 '국경찔레'인지 자생하는 국경찔레와 품종이 같은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붉은 찔레가 흰 찔레꽃의 돌연변이든 '압록가시나무'로 알려진 국경찔레의 일종이든 육종된 원예종이든, 학명이나 품종과 상관없이 고풍스런 전통 양반마을과 대구 도심 하천의 초여름 풍경을 더 아름답고 멋있게 꾸며주는 새로운 명물로 자리 잡았음엔 틀림없다.
◆토종 야생장미 찔레
찔레는 숲 가장자리의 양지바른 돌무더기나 죽은 나무 등걸에 기대서 자라는 우리 토종 장미다. 전국의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키 2m 정도로 가지가 밑으로 처져서 덩굴을 이루는 낙엽활엽수다. 줄기와 가지에 가시가 있어 잘못 건드리면 찔리기 때문에 찔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세기 유희가 저술한 『물명고』에는 장미의 자매괴(紫玫瑰) 설명에 '댓질늬(찔늬)'라고 나오고, 이철환과 아들 이재위가 지은 어휘집 『물보』(物譜)엔 장미를 'ᄶᅵᆯ늬'로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황필수가 지은 어휘집에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질리(蒺梨)에서 'ᄶᅵᆯ에'로 변했다고 풀이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찔레꽃이 추천명으로 나오지만, 국립국어원표준대사전에 찔레나무와 찔레가 표준어로 함께 등재돼 있다. 한자어로 야장미(野薔薇), 산장미(山薔薇), 도미(荼蘼)다. 어휘집에 나오는 찔레의 설명의 공통점은 장미를 설명하는 항목의 한 귀퉁이에 나오는 것이다.
◆춘궁기 먹거리 찔레, 찔레꽃
찔레의 터전은 개울가의 하늘이 탁 트인 무넘기나 돌담 시골 논과 밭이 두렁이다. 햇살을 좋아해 가시가 총총한 줄기를 뻗어 야생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춘궁기 봄볕이 달면 찔레의 오진 새순은 들과 산으로 쏘다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어린 아이들의 먹거리가 됐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여린 줄기의 떨떠름한 껍질을 벗겨내고 씹으면 아삭아삭한 고갱이에서 달짝지근한 물기가 입안에 확 번지는 맛이 상큼하다. 단맛에 길들여진 요즘엔 누가 먹겠냐마는 배고프고 가난한 시대 추억의 먹거리다.
새순이 자라서 가지가 억세지는 5월쯤에 다섯 장의 우윳빛 꽃잎이 소복한 노란 꽃술을 감싸듯이 활짝 핀다. 흰 꽃이 가지 끝에 5~10여 송이씩 몽실몽실 모여 피고 작은 나뭇잎 7개가 모여 겹잎을 이루며 진한 향기를 퍼뜨릴 때가 보릿고개다. 이때의 정서를 읊은 동시가 이원수의 「찔레꽃」이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언니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따 먹는 꽃이라오// 광산에서 돌 깨는 언니 보려고/ 해가 저문 산길에 나왔다가/ 찔레꽃 한 잎 두 잎 따 먹었다오/ 저녁 굶고 찔레꽃을 따 먹었다오//
1930년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발표된 동시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언니를 배웅하거나 마중하며 배가 고파 찔레꽃잎을 따 먹는 여자 아이가 그려져 있다. 이연실이 부른 「찔레꽃」의 노랫말은 이원수의 동시를 모태로 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이하 생략)
◆들판에 보아 주는 이 없어도
새하얀 찔레꽃 필 무렵의 절기는 대체로 입하(立夏)다.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위해 논둑을 새로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둔다. 수리(水利)시설이 변변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모내기철에 가뭄이 들면 농심(農心)은 바짝바짝 타들어 간다. 찔레꽃이 논두렁에 흐드러지게 필 때 가뭄을 '찔레꽃가뭄'이라고 불렀다.
모내기철은 찔레는 큰 시련을 겪는다. 감미로운 꽃향기에 무심하던 농민들도 찔레 덤불의 세력이 왕성해져서 가지가 논밭을 조금이라도 침범할 낌새가 보이면 바로 제거하기 때문이다.
사대부 집안에 피었더라면 사랑을 듬뿍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들판의 사람 눈에 띄지도 않고 홀로 피어있는 찔레는 애잔하기 그지없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인 노가재 김창업의 「야장미」(野薔薇) 즉 「찔레」라는 시에 그런 서글픔이 배어 있다.
해마다 들판과 구덩이에 흰 눈을 흩날리며
(每年塍塹雪紛紛·매년승참설분분)
먼 곳 가까운 곳에 짙고 맑은 향기를 퍼뜨리면서 피네
(馥郁淸香遠近聞·복욱청향원근문)
홀로 피고 지는 저 꽃을 누가 감상 하리오 만
(自落自開誰復賞·자락자개수복상)
농가에서 밭 갈고 김 맬 때를 알아낼 뿐이라네
(田家只用候耕耘·전가지용후경운)
진한 향기를 깊이 간직하다가 때가 되면 향기를 몽땅 쏟아내지만, 사람들은 밭을 갈고 모내기할 때를 알려주는 절기로만 여긴다는 말이다.
찔레꽃의 향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채 그림도 있다. 조선시대 최고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협접도(蛺蝶圖)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협접도는 찔레꽃 위로 호랑나비 세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부채에 실감나게 구현했다. 꽃 위에 벌이나 나비가 있는 건 향기가 예사롭지 않거나 꿀이 많다는 증거다. 화면의 여백에는 단원의 스승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과 대구 출신이라고 알려진 석초(石蕉) 정안복(鄭顔復)의 화평이 적혀 있다. 특히 석초는 나비가 비스듬히 왕성하게 나는 모습을 "붓 끝에 신이 있네(神在筆端)"라고 극찬했으니 나비의 비행을 감상하면 찔레꽃의 달콤한 향기를 상상하게 한다.
◆소시민에 대한 헌사
찔레 열매는 가을에 콩알만 한 크기로 빨갛게 익는다. 열매는 영실(營實)이라 하여 민간의 약재로 쓰이고 겨울에 배고픈 새들의 먹이도 된다.
조선 후기 학자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제1권 영실(營實)에는 "그 열매가 (별자리) 영실성 같아 영실이라 이름 한 것입니다. 봄에 난 순이 자그마할 때 따서 껍질을 벗기고 먹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질려(蒺藜)라고도 하고 그 열매는 까치밥이라고들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식물 분류학적으로 장미속(屬)인 하얀 찔레꽃은 화려한 색에 귀티가 나는 장미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장미꽃이 한껏 멋을 부린 도회지의 귀부인 풍모라면 하얀 찔레꽃은 흰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깨끗하게 차려입고 장보러 가는 옛 시골 여인의 소박한 모습이다. 찔레꽃은 장미꽃 못지않게 진하고 감미로운 향기를 지녔다. 비록 꽃이 필 때 잠깐이나마 향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더 끈다.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프요"를 목 놓아 부르는 소리꾼 장사익의 「찔레꽃」을 들으면 삶의 애환이 깊게 느껴져 마음이 처연해진다.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에 대한 헌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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