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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이 끝나면

관리자 2023.10.14 15:00 조회 수 : 31

*과거 시험이 끝나면 출방(出榜:합격자 발표)과 방방(放榜:합격증[紅牌] 수여)을 위해 방목이 작성되었다. 최종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이 방목은 시관들이 작성하였다.

조선시대 법전에서 무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급제자'였다.(《경국대전》 예전 홍패식(紅牌式) "紅牌式 敎旨具官某文科<武科則稱武科>某科<稱甲乙丙>第幾人及第出身者")

규정된 무과 시험의 절차(초시·복시)를 거쳐 합격한 사람을 '원(元)', '원일소(元一所)' '원이소(元二所)'로 표시해 나머지 급제자들이 직부전시로 합격했음을 나타냈다. 또 '직부'라는 직접적인 표시는 없지만 방목 끝에 '원방이십팔인 직부이백칠십이인(元榜二十八人 直赴二百七十二人)'의 형식으로 원방과 직부 인원만 기재한 방목도 있다. 이 밖에 '갑오남한시재(甲午南漢試才)' '계사중순시재(癸巳中旬試才)'처럼 무과급제자가 언제 어떻게 직부를 받았는지 기재한 방목도 있다.

직부전시자는 식년시 전시에 직부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중종실록 34년 11월 23일 식년시 정원 33명을 침식하는 탓에 증광시나 별시전시에 붙이기도 하다가 직부전시 인원은 정원 외로 처리하게 되었다 [명종실록 4년 9월 21일].

 *조선 왕조시대에 과거급제는 한양이든, 지방에서든 급제의 眞僞는 항상 있었다. 그래서 공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호적과 가문의 족보를 가장 중히 여겼다. 공문서 호적에 관직의 직역을 거짓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족보에서도 八道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듣고 하기 때문에 허위로 기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였다. 따라서 왕조시대에 족보는 신분을 증명하여주는 2대축(호적과 족보)의 기능으로서 가장 중히 여겼다.

*시험장에는 임금이 직접행차하게 되는데 정병을 필두로 취타대가 입장하고 그 뒤로 홍문대기, 주작기, 백호기, 현무기, 청룡기, 금백색기, 삼각기, 천하태평기 등의 의장기가 입장하고. 이어서 금월부, 은월부 등의 부, 금릭과, 은릭과 등의 과. 청룡당, 주작당 등의 당. 용선, 봉선, 청선 등의 선. 등의 여러 의장물들이 입장하게된다.

왕은 어연을 타고 내직별감, 상호군, 호군, 재호군 등의 호위무사들과 함게 입장하고 그 뒤로 문무백관, 승지, 별감 등의 시종관원과 별시위, 내금위 등의 시위군사 입장하며 그 규모는 약 6200여명이다. 그리고 어좌를 중심으로 시위군사들이 왕의 주변에 위치하고 개장보고를 하게된다.

 

*右捕廳膽錄 道光22年壬寅2月5日(1842년)

罪人趙貴哲年二十九自等汝矣身以....죄인 조귀철 나이 29 너는 遐鄕愚民으로서 상경하여 두류하면서 간활한 무리와 부동하여 홍패를 위조하여 登科하였다고 칭하면서 시골집에 내려가 문앞에서 遊街하다가 奸狀이 탄로나서 잡혀와서 취조를 받는 것인즉........................

위의 사건은 務安 三老面 升田里의 조귀철이 330냥으로 홍패를 사고 도문연의 준비물로 500량을 빌려 그 이자등을 갚지 못하여 兩漢이 本官에 呈訴해서 탄로가 났다.

 

 *右捕廳膽錄 哲宗己未(1859년) 사월초6일

문규상 나이 30세---羅州 三鄕面 德歭에 살고 직역는 儒業

김기정 慶尙道 慶州 南面桑木里에 살고 직역은 儒業

김한규 慶州 北面安溪村 거주

당시에 상당히 많은 홍패의 매매위조가 있었고, 모칭 유학을 통하여 신분을 상승시켜 양반이 되는 길 이외에도 僞譜를하고 이것이 버젓이 일반화 되어가는 세태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捕廳에 잡혀와 刑을 받았다.

 

상기 논문은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鄭奭鐘 著에서

 

*1800년 정조24년-------정조실록 [홍제전서]에서

3월21일 경과와 22일 人日製(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특별과거)

21일 경과초시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 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자는 모두 3만8614명이다.

22일 인일제는 모두 10만3579명이었고 시권은 3만2884명이었다.

무과응시생은 3만 5891명이었다.

특히 인일제 시험은 성균관 유생뿐만 아니라 경과 응시를 위해 상경한 경향 각지의 유생들에게 문호를 한번 더 열어준 추가시험의 성격이 짙다.

위 시험에서 12명의 합겨자는 전시에 나아갈 급제자이고 나머지 초시 합격자 1.000명과 인일제 차점 합격자 100명는 다시 本試驗을 치렀다.

총응시자 문무과 합쳐서 28만6915명이고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는 7만1498명이고 최종합격자는 익일제 급제자 2명포함해서 12명이고 초시에 급제한 사람은 1.1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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