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문중 ◉14세 한충의(韓忠義)
庚戌1430년推定 세종12년~ 配位 奉化琴氏(봉화금씨) 父 以詠(이영) 墓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형호리 형촌(衡村) 뒤 언덕에 있다.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사위(壻) 金克愧.申善甫.金習이다. 15세 한백(韓伯)己巳1449년推定 세종31년~ 配位 安東權氏 父 長孫이고 祖(조)權守精 (한백(韓伯):墓는 호명면 내신리 신당 아찬산(神堂阿餐山)에 있다.(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子:한학(韓鶴:啟功郎會寧敎授1470년생推定).동반관계(東班官階)종7품계공랑(啓功郞). 사위(壻): 박수위(朴守緯). 박빈(朴蘋1487-1563 字 는 蘋之). 1495년(연산군 1) 10월 8일 장령 이자건(李自健)이 왕에게 아뢰기를, "한충의는 드러난 직위에 서임함이 부적당합니다."라고 탄핵을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 았다. 그후 1498년 무오사화 한백(韓伯)사촌 형 한훈(韓訓)이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의 묘제의(廟制議)를 송나라 인종(仁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백세불천지주(百 世不遷之主)로 할것을 기초 (起草)한 사건에 연루되어 이성(利城)에 부처(付處)되었으며. 연산군 9년(1503 계해년(癸亥年) 무렵, 용가방 우두머리(首龍哥榜)사회가 - 16 혼란 한 틈을 타서 불량한 무리들이 종루에다 용가방(龍哥榜)이라는 방을 붙였다. 이 때 한충의(韓忠義)가 장안에 살았는데 歲數73세 였으며, 그의 아들 한백(韓伯)과 함께 이름이 오르니, 한백이 부친을 만나자 물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탄식을 했는데, 오익념(吳益念)이 근래 무뢰배(無賴輩)들이 인물을 평론하여 종이에 이름을 써 붙이고 ‘용가방(龍哥榜)’이라 하니, 익명서(匿名書)를 전파시킬 수 없도록 법을 거듭 밝히기를 청하였는데.[출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8년, 임술년(壬戌年), 1502년12월8일.불명예로 여겼다. ◾龍哥榜(용가방) 癸亥年間에有不逞之徒하야編朝官에狂妄愚戇者가分爲甲乙丙科三十三人이라號曰龍哥榜이니粘于鍾樓하야 戇(어리석을 당)榜(방붙일 방) 계해(1503 연산군 9년)년간에 불량한 무리들이 조정 관리중에서 망녕되고 어리석은 자를 엮어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나누어 33명을 만들어서는 용가방(龍哥榜) 이라고 이름을 붙여 종루에 붙여 놓으니.都下가喧播러라時에韓忠義가竝其子伯而參之러니 喧(의젓할 훤)播(뿌릴 파)도시에서 시골까지 시끄럽게 전파되니 당시 한충의가 그 아들 한백과 함께 명단에 들어 있었다. 伯이謁父則父曰爾聞龍哥榜乎아伯曰聞之矣니이다. 謁(아뢸 알)哥(노래 가)한백이 아비를 뵙자 아비가 물었다. “너도 용가방에 대하여 들어 보았느냐?” “예 들어 보았습니다.”父曰聞吾名이亦在라하니深可痛也로다伯이對曰大人則已矣어니와子亦參之하니是何故耶잇가하 거늘 深(깊을 심)參(간여할 참) 아비 한충의가 “내 이름도 있다고 하니 매우 통탄할 일이로다.”라고 하자 아들 한백이 “아버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소자역시 그 명단에 들어 있으니 이게 무슨 까닭 입니까?”라고 하였다. 聞者가只此一言으로亦足以居魁矣라하더라. 魁(으뜸 괴) 이말을 들은자들이 다만 이 한마디 말에 “역시 용가방에서 장원하기에 충분하도다.”라고 하더라. <참고> 연산군 8년 임술(1502) 11월 5일(갑술) 의정부에서 관원의 잘ㆍ잘못을 논하여 길에 붙이는 것을 엄단하기를 청하다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0월 1일 한훈(韓訓)소릉(昭陵) : 문종비(文宗妃) 건의 한 일로. 할아비 및 아재비·조카는 비록 죽었더라도 모두 부관 참시(剖棺 斬屍)하라 이 일은 율문(律文)에 없는 형벌로 다스린다. 하여 15세 한백(韓伯)선조께서 55세즈음 父親 한충의(韓忠義)丈人 琴以詠이 조선세종 때, 경북 예천 호 명면 월포리 우리개(愚浦里) 살았는데 妻家인 이곳으로 避禍하여 세거 하였다. ※ 참고(參考) : 휘(諱) 금이영(琴以詠)의 여서(女壻)한충의 (韓忠義) 자(字) 국이(國耳), 본(本) 청주(清州), 등문과(登武科), 관지(官至) 돈녕부(敦寧府) 부정(副正), 거 우포리(居愚浦里), 묘재(墓在) 형촌(衡村) 후원(後原), 丈人 금이영(琴以詠) 월포리(月浦里)서당골에 세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退官후 낙향하여 慶州地 方에 우거(寓居타향에서 잠시 살았다가) 서거후 월포리 서당골에 안장된듯 하다. ※ 주(註) : 우포리(愚浦里)는 지금의 호명면(虎鳴面)이고, 오천(浯川) 서당리(書堂里)는 지금의 호명면(虎鳴面) 월포동(月浦洞) 서당골을 말하고 있다. 이 양양지 (襄陽誌)는 예천지방(醴泉地方) 씨족(氏族)들의 전고(典考)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책임. ◾집안의 滅門을 피하기 위해 妻家琴以詠 世居地와 사위(壻)신선보(申善甫) 경상도 예천 월포리 洞界에서 豊山으로 넘어가는 언저리 골짜기에 살 았는데 경상도 예천으로 이주 하여 세거 하였으며, 예천군지 에 한충의(韓忠義) : 호명면 월포리 우리개 우포리(愚浦里) 사람, 자는 국이(國耳), 본 관은 淸州,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경북 예천군 호명면 월포리 우리개(愚浦里) 살았는데 갑자사화 에 피화 한충의(韓忠義)세거하여 살았다. - 17 ◾한충의(韓忠義)사위(壻)신선보(申善甫)피실, 직곡(稷谷)에서 살았다.○墓稷谷同原失傳,아주신씨교수공파. 열 두 피실이 있다고 하는데 월포리 洞界에서 豊山으로 넘어가는 언저리 골짜기마다에 마을이 있어 피실 또는 稷谷이라 불리고 있다. (안동예천경계지역) 또 이 고장이 가뭄을 많이 타는 곳이라 피농사를 짓고 살던 마을이라 하여 피실이라 불렀다.[출처]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직산리 [稷山里, Jiksan-ri] ▪ 신선보(申善甫)는 妻家 가까운 예천 직곡에서 세거하여, 선보는 인품이 온화해서 고을 사람들이 선인(善人)이라고 칭송하였다. 潛庵先生逸稿(잠암선생일고) 그는 훌륭한 재주를 가졌지만 오랫동안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높은 관직을 얻으려고 조급증을 내지는 않았다. 고을 사람들과 친척들은 그가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안동향교(安東鄕校) 향록(鄕錄)12월에 작성 前敎授 申善甫 老 올라있다. 鵝洲申氏 신시생(申始生)이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의 정사동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신개보(申介甫) 때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의 상리동 일대로 옮겼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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