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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門實記---僉使 韓忠常]

관리자 2023.10.02 11:58 조회 수 : 17

[家門實記---僉使 韓忠常]

 

공(公)은 參議公 韓磌의 여섯째 아들이고, 군사를 지낸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 永矴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 신씨(贈 貞夫人 平山申氏)로 장령 丁理(정리)의 따님이시다. 공은 첨사(僉使:僉節制使의준말)를 지냈다.배위(配位) 남양 홍씨(南陽 洪氏). 도사 서(都事 洪瑞從)의 따님으로 묘(墓)는 선영하(先塋下) 상하조(上下兆)이다. 아들은 별좌 회(別座 澮)와 참의 결(議 潔)이다.

기록상의 歷階를 보면 14世께서는 [部將] [典簿] [僉使] [僉知中樞副使]를 역임한걸로 기록되어 있고 지방수령으로 都護府使을 엮임하셨다고 본다.

세종29년 (1447년)에 한충상 나이는 약 3세~6세정도로 추정. 세조14년에 때에 대략 24~25세로 추정되고 중국에 가셨을때 나이는 대략 44~45세로 된다.  

한전(1408~1447) 한충인 1433년 출생..

典簿----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의 종5품 관직 정원은 1명으로 朝官이었다.

(14世 한충상- 丈人-----洪瑞從)남양홍씨 系譜

14世 홍언박 (門下侍中. 南陽侯) 1309(충선왕 1)∼1363(공민왕 12).

15世 홍사우(密直司使.全羅巡撫使)

16世 홍이(全羅道觀察使). 홍윤(高麗 恭愍王 弑害事件 主動者)

17世 洪仁老(예빈少尹). 義老. 信老

18世 洪瑞從(郡事)의 사위

19世 홍성손(護軍)

*홍서종의 첫째 사위 鄭价(첨지)는 영의정 鄭昌孫 子. 둘째 사위는 한충상. 셋째 사위는 조형손(判官)이다. 19세 南陽府院君 左議政 洪達孫은 17世 洪義老(上護軍) 손자이며 治從(府使)의 아들이다.

홍이의 아우 홍윤은 恭愍王 시역사건에 관여한 洪倫과 洪寬은 사촌간으로 文正公 彦博의 손자들이다. 홍윤는 아버지 師禹(文正公 셋쩨아들)와 兄 彛 도 함께 홍관은 아버지 師普(文正公 큰아들)와 동생 憲도 함께 모두 處刑되어 禍를 입었다.

*조선왕조실록(태종 13年 癸巳, 명 永樂 11年)

癸卯刑曹請全羅道水軍萬戶具成美等罪(계묘형조청전라도수군만호구성미등죄) :

계묘 일에 형조에서 전라도 수군 만호(全羅道水軍萬戶) 구성미(具成美) 등의 죄를 청하였다.

成美以船軍所造船隻(성미이선군소조선척) : 구성미는 선군(船軍)이 만든 선척(船隻)을擅給司宰少監洪仁老(천급사재소감홍인로) : 제멋대로 사재 소감(司宰少監) 홍인로(洪仁老)에게 주었고,

仁老亦遣本監水軍取用(인로역견본감수군취용) : 홍인로 역시 본감(本監)의 수군에 보내어 쓰게 하였는데,

命成美贖杖九十(명성미속장구십) : 명하여 구성미에게는 장 90을,

仁老七十(인로칠십) : 홍인로에게는 장 70을 속하게 하니,

皆減三等也(개감삼등야) : 모두 3등(等)을 감한 것이었다.

【분류】 *사법-행형(行刑) *사법-탄핵(彈劾) *군사-군기(軍器)

僉節制使 한충상 女壻

鄭鸞年-----연산군(燕山君) 7년 (1501)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2위 급제

연일정씨(延日鄭氏) 系譜

鄭思道(政堂文學.대제학.)---鄭洪(我朝知議政事.보문각대제학)--鄭淵(형조.병조判書)---鄭自源(강화부사.원주목사.掌隸院判決事)---鄭涵(僉正)----鄭鸞年(進士)-----鄭珙(陽智縣監)

*鄭鸞年 女壻------李漢禮(主簿), 宋世훈(안악郡守), 金以義(府使), 金漢孫(郡守)

*정함의 配位는 領議政 崔恒(1409~1474)女

*墓는 경기도 파주시 月籠面 屯田洞에 있다.

僉節制使 한충상 女壻

朴承元(別坐)----운봉박씨

------박승원의 女壻에는 長臨守 李舜民(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의 孫子)

朝鮮 王孫 顯錄大夫 寶城君 神道碑銘 에 별좌 박승원님이 기록되어 있다.

장림수 이순민은 따님 1명만 誕生하고 사헌부 감찰 海平尹氏 尹弘彦에게 출가시켰다.

윤홍언의 아들중에 尹承勳는 宣祖때 領議政을 지낸 文肅公

僉節制使 한충상 女壻

李克昌-----字는 胤夫로 1466년 世組12년에 태어나 성종21년1490년 武科에 급제하여 宣傳官에 뽑혔다. 내직으로 忠翊府都事. 訓鍊院判官. 司贍寺僉正. 尙衣院僉正. 外職으로 安峽縣監. 海州判官. 晉州判官. 甕津縣令. 麻田郡守. 醴川郡守를 지냈으며 1534년 중종29년 63세로 생을 마쳤다.

子는 李應星(武科及第..醴泉郡守) 墓는 경기도 파주시 月籠面 德隱5里에 있다

墓碣에는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醴泉郡守李公之墓淑人淸州韓氏之墓]

증조는 中樞院事 이정헌.

조부는 鐵原府使 이사민.

父는武科壯元. 병마사와 수군절도사. 兵曹參判. 吏曹參判을 지낸 李秉正(갑자사화때 충군).

有明朝鮮國淑人淸州韓氏之墓

通訓大夫行醴泉郡守李公之墓

公諱克昌字胤夫全義人高麗三重大匡棹之後曾祖諱貞幹中樞院事贈諡

孝靖祖諱士敏府使考諱秉正吏曹?判以守知事贈諡襄胡娶安東大姓直

長權永保女以丙戌生公公早投筆繼家業中庚戌武科選拜宣傳官歷忠翊

都事訓鍊判官司贍尙衣僉正出監吉城安峽兩縣道判海州晋州令甕津縣

守麻田醴泉二郡歲甲午病終于醴享年六十九葬坡州達田里先塋兆公性

剛直且友愛至老愈篤先配具氏無後早逝繼室淸州韓氏曾祖郡守永貞祖

參議磌考典簿忠常?南陽洪氏內外皆世閥也甲寅歸于公在世六十八年

後公十有二載而終葬公之左禮也生二男三女男長應星娶?奉黃承祖女

育三男一女男長曰貞臣餘幼女適柳堈次應箕未娶而亡女長適忠義衛李

?權知承文副正字彦忠其子也僉使韓仁源其?也一女幼次適權好仁次

適忠義衛權深各生一女幼

資憲大夫漢城府判尹兼知春秋館事宋?撰

折衝將軍行義興衛大護軍金魯書

嘉靖丁未四月 日 立石

*嘉靖丁未(1547년. 朝鮮明宗2년)

(조선왕조실록 한충상)

세조 14년무자(1468성화4년)/05/16(을해) / 장귀동이 살인한 것을 용서하게 하다

御序賢亭(어서현정) :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召承旨等視事(소승지등시사) : 승지(承旨) 등을 불러 정사를 보았다.

部將韓忠常(부장한충상) : 부장(部將) 한충상(韓忠常)이

嘗率正兵張貴同(상솔정병장귀동) : 일찍이 정병(正兵) 장귀동(張貴同)·

安元(안원) : 안원(安元)·

全元等(전원등) : 전원(全元) 등을 거느리고

捕盜於城外(포도어성외) : 성(城) 밖에서 도적을 잡았었는데,

貴同等打殺結城京邸吏魯生之妻(귀동등타살결성경저리로생지처) : 장귀동 등이 결성 경저리(結城京

邸吏)* 노생(魯生)의 아내를 타살(打殺)하였으므로,

刑曹啓曰(형조계왈) :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貴同律應絞(귀동률응교) : “장귀동은 율(律)이 교형(絞刑)에,

忠常等杖一百流三千里(충상등장일백류삼천리) : 한충상 등은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해당합니다.”하니,

上謂同副承旨韓繼純曰(상위동부승지한계순왈) : 임금이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이르기를,

人之致死(인지치사) : “사람을 치사(致死)케 한 것이

不應若是易也(불응약시역야) : 이와 같이 쉽게 응해질 수가 없다.

當初漢城府(당초한성부) : 당초에 한성부(漢城府)는

因屍凍(인시동) : 얼어 죽은 시체를 검

檢視不詳(검시불상) : 시(檢視)함에 자상하지 못한 때문이고,

今則日月已久(금즉일월이구) : 이제는 일월이 이미 오래되어

亦難詳辨(역난상변) : 또한 자상하게 분별하기가 어려운데,

又經赦宥(우경사유) : 또 사유(赦宥)를 경과하였으니

竝皆原之(병개원지) : 아울러 모두 용서하게 하라.”하였다.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경저리(結城京邸吏) : 고려와 조선조 때 지방 관청과 중앙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게 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서울에 파견하던 향리(鄕吏)

 

*部將:

오위의 부장은 정원이 25인으로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 등으로 별칭되었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에서 각 부(部)를 통솔하던 종육품(從六品) 서반 무관직으로 정원은 25원이다. 오위는 의흥·용양·호분·충좌·충무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중·좌·우·전·후부 등 5부씩 두고, 각 위를 맡은 위장(衛將) 밑에 각 부를 맡은 부장이 5명씩 배치되어 있어 총 25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로 사과(司果: 正六品)가 있고, 아래로 부사과(副司果: 從六品), 사정(司正: 正七品)이 있었다. 참상(參上)이 10원, 참하(參下)가 14원, 음참하(蔭參下)가 1인인데, 참하와 음참하는 재직 20개월이면 출육(出六)하였다. 부장은 宣傳官 진무(鎭撫)와 함께 서반청(西班廳) 요직으로 꼽혀, 이들에게는 그 아들에게 음서(蔭舒)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부장들은 시가(試可)를 거쳐 수령 등에 제수되었다.

文武官職자의 淸要職은 양반중에서도 제일의 문벌이 좋은 집안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는 양반의 핵심 관직이었다.

正兵:

육군에 종사하는 양인 농민의 의무군역을 정병이라고 부른 것은 1459년(세조 5)의 병제개편 때 부터였다....정병에 속하는 신분층은 양인 농민 가운데 상층부에 위치하였다. 세조 때 군액확장책 (軍額擴張策)에 따라 현직(顯職 : 높거나 고귀한 관직)을 거친 관리 신분층이 대부분 정병으로 뽑혀서 배정되었던 적도 있다.

 

(표해록(漂海錄) 제3권에 한 충상 선조님 행적)

무신년(1488, 성종 19) 4월27일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 사신(謝恩使臣)을 만났음.

치소의 서북 모퉁이에 장감(張堪 후한 광무제 때 사람)의 사당이 있었으니, 장감이 어양 태수(漁陽太守)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에게 씨 뿌리고 나무 심는 것을 가르쳤더니 동요(童謠)에, ‘보리 이삭이 두 가닥이 졌다. ……’고 했다 합니다. 장감이 떠난 뒤에 그를 사모하여 사당을 세웠는데,새로 세운 것과 같았습니다. 신 등이 길을 떠나려고 하니 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조선국 사신이 왔습니다.’ 하므로, 신은 장술조에게 말하기를,

“우리 본국 사신이 곧 온다지요. 만약 노상에서 서로 만난다면 한번 읍(揖)만 해도 좋으니, 나는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본국 고향 소식을 알고 싶소.”하니, 장술조는 말하기를,“좋습니다.”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경에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한충상의 매형),서장관(書狀官) 윤장(尹璋)과 최자준(崔自俊)ㆍ우웅(禹雄)ㆍ성중온(成仲溫)ㆍ김맹경(金孟敬)ㆍ장우기(張佑奇)ㆍ한충상(韓忠常)ㆍ한근(韓謹----한충인의 둘째 아들)ㆍ오근위(吳近位)ㆍ김경희(金敬?)ㆍ권희지(權?止)ㆍ성후생(成後生)ㆍ이의산(李義山)ㆍ박선(朴璇)ㆍ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

(漁陽驛) 안에 우거하였으므로,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마당 가운데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또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 말하기를,

正使성건은 1438년생으로 중국사신으로 갔을 때 나이는 대략50세, 한충상 선조님의 나이는 대략 45세정도 된다. 매형인 성건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는 성건의 자제군관으로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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