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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한집에서
서설
[첫눈 내린 오늘 아침 따을 가득 뎦었으니,
황홀하게 수정궁에 나를 앉혀 놓았구나.
사립문에 누군가가 섬계(剡溪)찿아 왔으려나,
앞산에 소나무를 나 혼자서 마주하네.]
첫눈이 올 무렵은 대개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前이어서 오는 듯 마는 듯 감질나게 내리거나 절반쯤 녹은 눈비의 형태로 내릴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첫눈은 밤사이에 수북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야 반가움과 경이로움이 큰 법이다. 그래서 작자는 황홀하게 자신을 주정궁에 앉혀 놓은것 같다고까지 하였다.
세번째 구는 유명한 고시를 사용하였다. 명필 왕희지와 그 아들 왕휘지는 부자간에 고상한 풍모로 유명하다. 그 왕휘지가 함박눈이 펄펄내리는 어느날 밤에 문득 섬계에 살고있는 친구 대규(戴逵)가 샹각나서 배를 타고 찿아갔다.
그러나 정작 문앞에 이르러서는 홀연 되돌아 오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 만고에 회자된다. " 원래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꼭 친구를 볼 필요가 있겠소 " 논리적으로 따지면 실없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作爲에 얽매이지 않는 유유한 태도는 가히 禪僧의 경지이다.
따라서 이 세번째 구는 " 내 친구중 누가 왕휘지처럼 지난밤에 흥이 나서 나를 찿아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드러낸 것이다. 대규의 입장에서 는 친구가 왔다 갔는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한밤중에 자기를 찿아와 줄 생각을 하는 고상한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작자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 것이다.
.여기의 소나무는 바로 자신의 정신적 지향을 나타낸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이다. 한해가 다 저물어 온갖 나무들은 낙엽지고 앙상한 모습인데 앞산의 소나무는 곳곳한 자태로 푸름을 잃지 않고있다. 마지막 구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