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山韓氏들이 잃어버린 선조님이 韓邦信이라 하는것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곡산한씨들은 자제위 사건에 의하여 邦을 方으로 개명하여 청주한씨로 입문하였다고 한다)
韓方信 記錄物
동문선. 동사강복, 목은집.신증동국여지승람,고려사.고려사절요.
(老松堂日本行錄家藏) 송희경[1376~1446]의 호는 노송당(老松堂)
(壄隱逸稿) 고려 말의 문신 전녹생(田祿生:1318∼1375)의 시문집
大元至正十五年乙未及第枋
등에 韓方信으로 기록되어있음. 포은 정몽주 문집에는 韓邦信으로 표기.
목은 이색의 시에 의하면 정몽주가 급제할 때 試官이 韓方信으로 표기.
高麗史에는 시종일관 韓方信으로 기록되어있고. 또한 韓邦彦이란 분도 기록되어있다.
高麗史에 기록된 韓邦彦님처럼 韓方信님도 韓邦信으로도 기록되기도 했던것이다. 다만 포은집에서만 韓邦信님으로 기록되어 있다하여 곡산 한씨들이 말씀하시는 것은 착오일 것 같다. 포은집에서 한방신님은 [方]을 [邦]으로도 같이 사용했던 것 같다. 恭愍王弑害때 韓安의 姻戚이란 이유로 韓脩.韓理가 귀양을 갔던 것을 상기해보면 알 수가 있고. 이미 자제위 사건이전에 上記 기록물에서 韓方信이란 이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谷山韓氏) 시조 한예(韓銳)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1206년(희종 2) 8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왔다가 귀화하여 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했으며 후에 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청주한씨 9세한방신 선조님이
곡산한씨 세보에 5세손 둘째 아드님으로 기록되어있다.
시조:한예(문하시중평장사)
2世: 한희(밀직부사)
3世: 한익(판도판서)
4世: 한진(정당문학)
5世: 韓邦佐(관찰사)
韓邦信=韓方信
6世: 한옹(의정부참찬.개성유후사유후.평절公)
청주한씨 참의공파 구암문중 홈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