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현정기 棠峴亭記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는데 지난 을해년(1959년) 가을에 요행이 청호의 위에서 만날 기회가 있어 수인사를 끝내고 온종일 정감을 나누다 수를 같이 타고 나에게 와서 유숙하게 되었다. 단정히 앉아 옷깃을 여미고 묻기를 그대께서 당현으로 호를 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소백이 심어놓은 무성한 감당나무를 시인들이 사랑하여 자르지도 말고 베지 말라는 감당의 당자唐와 현은 산의 높음에서 취한 것 같으니 호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웃고 답하기를 아니다 별다른 뜻이 없고 우리 고을의 옛 이름이 당악(棠岳)이기에 그 당(棠) 자와 내가 살고 있는 북쪽에 부아산(負兒山)이 있는데 산(山)이 높지 않고 수려하여 우리 고을의 고호를 잊지 않고 사는데 가까이 있는 산을 사랑하여 스스로 호를 한 것이다. 라고 하니 내가 곧 얼굴빛을 가다듬고 답하기를 이제야 그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산간에서 은거하며 의를 행함을 알겠다, 그렇다면 그대는 혹은 산에 나무하며 혹은 물에 고기 낚으니 소백(召伯)이 아니며 혹은 호미 메고 달빛아래 돌아오고 혹은 지팡이를 의지하고 시냇물 소리를 들으니 도금(陶今)이 아닌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다 이와 같으니 이 또한 명(命)이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리요. 그러나 그대는 나무꾼도 농사꾼도 아니니 옛적으로 말하면 일민(逸民)이요 지금으로 말하면 노사(老師)라 할 수 있다. 덕성이 온순하고 기질이 온화하며 수신제가에는 근검으로 근본을 삼고 대인접물에는 화열로 주를 삼으며 이 글에 종사하며 가르침을 게을리 아니하며 손에 책을 놓지 않고 백수(百首)에 까지 이르니 글을 배우는 자들이 자기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그의 뜻에 깊이 빠져 함양하게 된다. 씻는 것은 그때를 버리고 새로움을 얻는 것이요 마시는 것은 그 양을 채우고 남은 갈증이 없게 함이니 이에 수업하는 문인들이 가장 많아졌다.
아~ 온 세상이 큰물이 흘러 가득 조류에 따라가고 인정이 메말라 예절에 어두운데 속세를 떠나 산간에 은거하는 이런 선비가 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의 당현선생은 반드시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야 할 분인데 백두(白頭)로 늙어가니 하늘도 믿기 어렵구나!
내 비록 글을 하지 못하나 하룻밤 유하며 문답 하는 말로 졸문(拙文)임을 잊고 당현기를 쓴다.
우당 박재빈作
*당현선생 이영규씨는 我 고모할머님의 시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