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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韓潔(1479生推定결)

관리자 2025.03.23 20:57 조회 수 : 45

◾15세韓潔(1479生推定결)

 

선조께서는 甲子士禍1504에 禍가 미치어 伯父 韓忠仁(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邊郡:가족이 흩어짐)에 潔(1479推定결)선조께서는 妻 家(丈人)박이온(朴而溫) 집성촌(古 羅州牧 元井里 현: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父親 忠常(1444推定僉使)과 避禍 하여 世居 하였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후 父親 韓忠常 兄 韓會와 丈人 ⁕朴而溫(昇平君)漢陽으로 上京 하였으며, 韓潔(1479推定결)선조께서는 配位 順天朴氏와 世居하셨는데, 親四寸*領議政 박원종(朴仲 善의 子)의 반정에 참여 하였다가 박원종의 勳業이 盛滿함을 보고 장차 집안에 威化가 올 것이라 예견하고 1507년경 羅州로 落南하여 자손들이 살고 있으며, 그후 己卯士禍1519년11월(중종14 僞勳削除)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靖國功臣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호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 이후 1524甲申年 丈人이 卒 하였으며, 16세 한삼희(韓三喜)1509生 推定 선조도 配位:제주양씨 집성촌양우지(梁友池)(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11킬로 거리 를 두 고 婚姻 하여 世居 하시다가, 조선 중종 22년(1527) 일어난 작서(灼鼠: 불에 탄 쥐)의 변(變)시작되어 1532년 중종은 가작인두의 변이 박씨에게 잘 보이려 한 무 리들이 벌인 짓이라며 경빈 박씨에게 5월 23일 사약을 복성군과 경빈 박씨(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敬嬪朴氏順天人)의 짓이라고 판단하고는 두 사람을 사형시 켰다. 變이 일어나자 순천박씨문중이 禍를 입었고 ⁕둘째아들 박시손(朴蒔孫)은 화릉참봉(和陵叅奉)이고 配位는 淸州韓氏이며 세거 하여 졸 하였는데 영암군 구 림봉아래 간좌이다. (古 羅州牧 元井里 현: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이때 1527년경 韓潔(1479推定결)선조께서는 家産을 정리 子한삼희(韓三喜1509 推定)선조의 - 26 妻家인珍島(제주양씨집성촌)로 移住하였으며, 韓潔(한결)선조의 丈人朴而溫(昇平君)의 子 朴蒔孫(박시손)과 孫子박돈근(朴敦根) 1527년(중종 22) 灼鼠之變(작서지 변) 福城君─獄事 에 避禍 되어 孫子 朴敦根이 言事로 인하여 茂長(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지역으로 유배 가 그곳에서 정착 하였다. 順天朴氏族譜에 諱名漏落 기록되지 않은걸 보면 구초보⁕광주파보 두 族譜누락. 후손원통함에등재 17세 한윤신(韓胤臣1528년生 推定)出生前 珍島로 입향, 관하 에서 운영하는 궁장(宮莊)이용하여 언전(堰田(제언 내부의 농지)을 조성하여. 적지 않은 지역의 인원이 동원되고 관의 허가가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양반은 유자 儒子로서 경세經世의 富를 이루어 후손 세계를 이어 오지 않았나 사료 되며, 또한 兄인 한회(別坐각 관아에 둔 정ㆍ종오품 벼슬)嫡子세립(世立)无後이며, 次子세 건(世建)1545년乙巳士禍순천박씨문중이 避禍에 두 兄弟 에게도 禍가 미치어(无後절손(絶孫)되었고, 次子세건(世建)후손은 忠順(강화부사)할아버님의 孫(韓世弘의 4子瓘)에서 養子(양자) 왔지만 壬辰外亂1592,丙子胡亂1636를 거치며 고향에 갈 수가 있는 근거를 상실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보여진다.

 

※韓潔 丈人 朴而溫(1461년세조7년~1524년 중종19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자화(子和). 世居는 京이다... 祖는 朴去疎(平原君) 曾祖는 朴錫命(병조판서.集賢殿大提學.知議政府事)이고 父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박숙선(朴叔善)이다. 박이온의 조모님은 청송심씨 영의정 심온따님이고 세종대왕 비 소헌왕후와 형제다. 1986년 겨울에 진도에 현존하는 韓氏의 宗親들 중 가장 年長者 이신 한경배. 한병삼 종친께 전화로 입향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적이있다. 그런데 본인들도 입 향조께서 어떤 사유로 오신지 전혀 알수가 없고, 다만 전설처럼 한결 선조께서 진도 郡內面에 큰 원장을 만들 때 어찌나 혹독하게 사람들을 다루었는지 죽은 후에 진도 사람들이 선조님의 墓碑을 파서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本人이 직접 官에 許可를 받아 干拓 事業 을 하셨을 것이다.

⁕태종 14년(1414년) 진도 거주가 허용되고, 진도를 다시 개척하고 목장을 만들기 위해 진도에 들어간 주민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와 같이 堰田 (서울에서 거주하는 양반이나 지방에 유력한 양반이 立案折受를 받아 奴婢와 일반 農民을 동원하여 干拓하고 농지를 造成하는 것을 堰田이라 함)이란 방법으로 농토를 늘려 富를 쌓았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현재 潔(결)선조님의 묘소가 實效되어 있는데 昌寧 曺氏 先山 위에 墓2基가 있는데 그게 潔 선조님의 墓所가 아닐까? (17세 胤臣할아버님의妻家)추정할 뿐 이라고 하셨다. 또한 落水聲公 崇智선조님의 學行著世의 冊이라도 있느냐고 問議하니 부끄럽게도 전해져 오는 선조들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祭閣(忠 賢祠)만 珍島宗中에서 잘 嚮祀한다고 말하셨다. 珍島郡 古郡面 石峴里之族이 稱托沃溝譜及珍島譜(붓으로쓴족보)에 入譜하였다고 不應하였는데 1962년 叅議公派 壬寅譜에 입보 하였음. 18세 韓楨(한정) 선조의 諱에 대한 問 중종반정때에 忠常→澮(潔의兄)고양으로 귀향 하였지만, 진도문중은 그 먼 先考고향 高陽에서부터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을 거쳐 영암군 도포면에서 世居 하시다가 家産을 정리 (韓三喜한삼희1509 推定)선조의 妻家인珍島(제주 양씨집성촌)로 移住하였으며 壬辰外亂1592,과丙子胡亂1636를 거치며 진도에 입향조이신 (潔결)선조께서 모진 풍파속에 세거 하시며 (子三喜삼희) 선조께 선고의 고향과 낙향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문의 (癸亥靖亂계해정란)에 18세惟省,惟翔,惟吉,惟赫형제들에게 禍가 미치니 18세楨(정)할아버지의 (行列항렬)을 다르게 하 여 禍를 피하였으니, 가문의 내력을 未洽(미흡)하나마 楨(정)할아버지의 諱를 통하여 후손에게 전함이 아닐까! 진도문중의 계보는 忠常→潔→三喜→胤臣→楨으 로 계보를 이어왔다. 후손에게 (父親胤臣윤신)께서 (嫡子楨정)으로 (名이름)을 지을때에- 27 가시에 찔려 피 흘린 아버지는 (潔결) 셋째 하늘에 있는 빛이고, 가시에 찔려 피 흘린 하늘 사람이다. 라는 뜻으로 몸과마음이 밝고 힘찬 아침의나라 아침에뜨는 태양이 산의나무 가지사이로 세상을 굳건 튼튼하고 일차게 살아가라 (名이름胤臣윤신) 하였으며, (次子韓祥한상) 이름자는 상서롭다 와 조짐, 자세하다 라는 뜻으로. 祥자는 示(보일시)와 羊(양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희생양(犧牲羊)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 했으며. 羊자에 제단을 그린 示자가 결합한 祥자는 신에게 양을 바쳐 제사 지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복을 기원하기 위해 서였다. 祥자가 제사를 통해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곳에 叅義公派 15世孫 潔선조께서 子三喜께 학문을 연마 시키어 뜻을 전하니 17세 胤臣(윤신)선조께서 妻家昌寧曺氏에서 世俗을 이루었으며, 선덕(先德 조상 들이 선행을 베풀고 행하면 그 선행이 후대로 이어지는 결과)을 후대에 전하지 못할까 몹시 걱정하여 홀로 생각하여, 子楨(정)과祥(상)의 名(이름)을 지었으며 윤 신(胤臣)공의 덕과 높은 풍도 같은 것은 전술(傳述기술(記術)하여 전(傳)함)해야 한다는 것은 공께서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현부(賢否현명함과 그렇지 못함)를 따지지 않고 모두 비지(碑誌)를 구하고 비지(비문(碑文) 비에 새긴 글)가 한번 나오면 누구나 선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것으로 뒷사람을 속이는 것이 과 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여 진도에 설단을 竪立하였고, 고성리에서 석현마을로 향하는 도로변 산기슭에 위치한 청주한씨 참의공파 문중사우忠賢祠(충현사)를 통하여 과중하게 포양(褒揚칭찬하여 장려함)하니, 世德(대대로 쌍아온 미덕)이 아닐까! 전 하여 본다.

◾한삼희(韓三喜)1509 推定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오래된 제주 양씨)의 집성촌이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 겸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백윤(伯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처남이자 윤임과 장경왕후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노수신[盧守愼]1515년(중종 10) ~ 1590년(선조 23)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명종 즉위년)이후 1547년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진도로 移拜 19년간 [沃州二千言]노수신이 진도에 유배와서 자기의 심사를 이천자(二千字)로 적어 놓은 글 내가 귀양살이 온지도 어언 반년이 되었구나. 온 포구는 왜적들이 발동하여 피에 젖었고 석가래 사이에 시(詩) 몇 편 걸려 있어 읊으려니 목이 먼저 메이는구나. 멀리 우수영(右水營)을 바라보니 움막들이 언덕 위에 의지하고 있는데 흩어진 군졸들의 거처라네. 온 고을은 분탕되고 전답(田畓)에는 쑥풀만 무성하네. 가엾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붙잡고 떠돌아다니니 애처러워 차마 볼 수가 없어 싸릿문을 닫아 버렸네. (조선 중기 진도군의 풍속과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 「옥주이천언」 [沃州二千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甲寅正月1554년 명종9년.4월 점찰산에서 한숭덕에게 보이다 占察山示韓崇德 1545년~1564년 유배생활중 소재선생 40세에 한숭덕(韓崇德)점찰산에서 한숭덕에게 보이다〔占察山示韓崇德〕소재집3권 ▪소재집 제4권 / 시(詩) 향교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숭덕의 시운에 차하다〔飮鄕校次韓崇德〕乙卯年10월 (1555년(명종10) ◾한숭도(韓崇道)1567년丁卯生.(진도군 고군면 석현리및 조도면 나배도리 세거) ◾한숭덕(韓崇德)생년추정世居不 족보에 사위로 기록 되어 있으나, 밀양인 박인복(朴麟福, 1550~1595)부인 정주한씨(定洲韓氏)기록 사이에 박성(朴晟), 박섬(朴 暹) 등 형제를 두었다. 명종 5년(1550) 의신면 칠전리에서 태어났고 1630년 형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효충사에 배향되었다. ◾한숭무(韓崇武)韓楨과配位密陽朴氏(仁春)繼配忠州池氏 사이에 仨子로 출생 하여 子.應瑞.를 두었으나 後繼无.

◾한숭지(韓崇智)1586년 丙戌生.(진도군 고군면 연동 및 유교리 일대 세거)1650년 효종원년 64세 졸 學行著世. 이후 27세 韓萬順선조의 三子 28세 韓世泰할아버지께서 해남군 황산면으로 이주 하여 후손 세계를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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