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永矴 丈人 金英烈]
김영렬 家系
祖 김룡비(金龍庇)---金紫光祿大夫 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의성김씨의 중조이다.
父 김굉(金紘)----銀靑光祿大夫 尙書僕射. 義城府院君
叔父 김영(金英)----集賢殿 直提學. 門下侍郞 贊成事
雪夜-----義城君 襄昭公 五言絶句詩
蕭灑寒宵氷 雪月滿山川 別有襟期聳 庭松立凜然
소슬한 겨울밤은 깊어 가는데 눈빛, 달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유달리 높은 기개가 있기에 저 뜰 앞 소나무는 의연히 서 있도다
蕭(쓸쓸할소.떨어지다)灑(뿌릴쇄.떨어지다.바람이불다)寒(찰한)宵(밤소.초저녁)
氷雪月滿山川別有
襟期(기다리다. 기약하다.바라다.모이다.정하다.적합하다.가르치다.더듬거리다.기간)
聳(솟을용.두려워할송.)庭松立
?(찰늠.차갑다.꿋꿋하고의젓하다.늠름한모양)
然(그러하다연.명백하다연.분명하다.~하다연 불타다연.듯하다연)
*雪夜---이 詩는 의성군이 10여세때 지은 시다.
한영정의 장인 의성군 김영렬 (1370 ~ 142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열지(熱之), 호는 맹암(孟巖),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얼굴이 준수하였으며 재질이 뛰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겸 무신으로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문과 등제하여 수군절제사, 안무사, 병조참판을 지내었고,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하여 1397년 파직되어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대왕으로부터 표리(表裏: 겉과 속의 옷감)를 하사받았다. 이후 은퇴하여 장단(長湍)의 맹동(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었고,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장성(長城)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문집으로『맹암집(孟巖集)』이 전한다.
신천서원(新川書院)은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에 있다. 이 건물은 맹암(孟巖) 김영렬(70~1422)을 추모하기 위해 1945년에 건립하였고,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로 지정됨
태종실록 8권 4년 12월 1일 (무진) 001 / 의성군 김영렬의 졸기
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시호를 양소(襄昭)라고 하였다.
김영렬은 집안의 영향으로 공부에 독실하여 일찍이 경전의 묘리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소학(小學)』 한 편을 평생 처신의 규범으로 삼아 아주 작은 행동도 그 교훈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일찍이 눈 내리는 밤에 부친과 함께 앉았다가 설야음(雪夜吟)을 읊어보라 명하니, 즉석에서 지어 올리기를, ‘소슬한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눈빛, 달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유달리 높은 기개가 있기에 저 뜰 앞 소나무는 의연히 서 있도다’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0여 세였으므로 부친이 그에게 충정의 기풍이 있음을 기특하게 여기었다.
그 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방문하여서 그의 생김이 출중하고, 시의 기특함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사나이다”고 하였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도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경서를 논란해보고는 아들 이래(李來)를 맹암에게 보내 함께 강학하게 하였다. 20세 전후에 학문이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나자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소년등과는 사실 좋지 못한 일이고, 공자도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하였으니, 지금 어찌 진취할 때라 여기겠습니까?” 하며 문을 걸고는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문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성명을 듣고 누차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나, 26세 때 부친의 간곡한 설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등과 협력하며 국정을 운영하였다.
맹암실기(孟巖實記)
본문
卷1
詩
雪夜, 赴 召感吟, 南山詠雲, 退居詠懷, 孟洞草堂, 退居詠懷, 孟洞草堂, 又
疏
「辭職疏」 3
고려조에 입은 은택이 큰데다 盛滿을 경계하는 가법을 앞세우고, 또 자신은 이미 삼품의 직위를 차지하여 기대하던 바에 이미 지나치고 분수에 넘친다는 점, 아버지의 연세가 높다는 점을 들어 사직하고 싶다는 내용을 적었다.
書
「答趙相國英茂書」 4
자신의 사직을 만류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答李贊成叔蕃書」 5
내용은 위와 같다.
「答權陽村近書」 6
내용은 위와 같다.
「答李容軒原書」 6
내용은 위와 같다.
雜著
「會盟錄」 7
李芳遠이 신하로써 開國定社佐命功臣 등을 이끌고 皇天上帝와 宗廟社稷과 山川百神의 혼령에게 고하는 글이다. 먼저 태조가 神武한 자질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입어 한 나라의 군주가 될 때, 자신 또한 勳臣들과 함께 피로 동맹을 맺어 대업을 도와 이루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두 번의 靖亂에 두 번 고쳐 결맹한 일의 정당성을 밝히고, 자신이 왕위를 이은 지 삼년 만에 동맹의 이름으로 上下神明에 고하는 내용을 적었다. 국가와 군주에게 충성을 다 할 것, 사심을 품어 동맹을 배반하고 형제들을 모해하는 행위는 곧 천지신명을 속이고 君父를 배반하는 것으로, 주벌이 자신뿐 만 아니라 세세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 등의 내용이다. 會盟에 참여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義安大君 李和, 寧安君 李제, 奉寧君 李福根, 完川君 李淑, 上洛府院君 金士衡, 晉山府院君 河崙, 昌寧府院君 成石?, 平壤府院君 趙浚, 安平府院君 李舒, 牙山府院君 李茂, 漢山府院君 趙英茂, 靑原君 沈德符, 寧城君 吳思忠, 完山君 李天佑, 漢川君 趙溫, 星山君 李稷, 宜寧君 南在, 平原君 趙(玉+業), 吉昌君 權近, 安城君 李叔蕃, 花山君 張思吉, 延城君 金輅, 文城君 柳亮, ?城君 孫興宗, 漆城君 尹芳祇, 義城君 金英烈, 鷲山君 辛克禮, 淸城君 鄭擢, 長城君 鄭熙, 玉川君 劉敞, 平城君 趙?, 蓮城君 金定卿, 驪江君 閔無咎, 驪城君 閔無疾, 南陽君 洪吉민(日+文), 興寧君 安景泰, 西川君 韓尙敬, 鷄城君 李來, 義原君 黃肖, 麗山君 金穩, 花城君 張志和, 麻城君 徐益, 坡平君 尹坤, 陽城君 洪恕, 興城君 李敷, 驪川君 閔汝翼, 漆原君 尹子當, 會寧君 馬天牧, 豊川君 沈龜齡, 利城君 徐愈, 鐵城君 李原, 潘城君 朴?, 瑞寧君 柳亢, 漢平君 趙涓, 東平君 成石용(石+容), 沔城君 韓?, 通原君 李從茂, 谷城君 延嗣宗, 熙川君 金宇, 平壤君 趙 , 平原君 尹穆, 君 外에 文杓, 朴錫命, 李膺, 宋居信.
「功臣錄」 14
太宗朝의 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의 신분과 훈급을 기록한 글이다. 일등 4인, 2등 3인, 3등 9인, 4등 22인으로 총 38인인데, 良昭公 김영렬은 삼등에 올라 있다.
모두에 약간의 설명이 있는데, 『국조보감』의 기사와 주를 인용하여 朴苞가 왕자 芳幹을 옹위하여 반란을 모의함에, 이를 진정시키는 데 있어 공로가 혁혁한 인물 38인에 대하여 공신으로 책록한다는 내용이고, 양소공에 대한 기사는 아래와 같다.
金英烈 義城人 府院君 紘子 字 烈之 號 孟巖 兵曹參判陞正憲大夫知承樞府事 義城君 贈右議政 諡良昭 長城立祠
「出國史追補」 17
수군의 지휘자로 왜구를 방어한 이력을 적은 기록이다.
“太祖 4년 을해년 8월 9일, 右道 水軍僉節制使 김영렬이 왜선 한 척을 탈취하고 왜구 스물을 생포해 바친 공으로 廐馬 한 필과 비단과 官?을 하사했다.(太祖四年 乙亥 八月 九日戊子 右道水軍僉節制使金英烈 捕倭船一隻 生擒二十人以獻 賜廐馬一匹 綺絹官?)”
는 기사로부터, 모두 4회에 걸쳐 출격하여 접전하거나 방비한 기사가 등재되어 있고, 그 결과 계유년 參判承樞府事로 陞秩한 사실 까지를 기록했다. 마지막에, 仁祖 계미년에 영당을 건립한 사실과, 肅宗 무술년 서원으로 승격하고 ‘襄昭公兵曹參判太宗功臣’으로 題號한 사실을 기록했다.
卷2
附錄
「延諡顚末」 1
世宗 계미년 議政 權軫이 ‘良昭’라는 諡號 備望을 入啓하여 윤허를 받은 사실로부터, 贈諡와 아울러 贈職이 함께 이루어 진 사실, 이미 있었던 화상을 자손가로 보내면서 禮官으로 하여금 致祭한 내력을 간단히 적은 기록이다.
「賜祭文」 1
모두에 前參判義城君의 忠貞은 실로 국가가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훈열임과, ?血同盟으로 敵徒의 예봉을 무릅쓰고 심력을 바친 결과 그 분들과 함께 성대한 명성을 이루었음에 대한 致辭를 적었다. 공을 이루었음에도 물러나 初志를 지킨 덕을 흠모하여 작위를 더하고 시호를 줌으로써 신명을 위로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畵像贊」 1
3건인데, 靑城伯 沈德符와 容軒 李原 그리고 判書 李升商이 각각 지었다.
「畵像?」 1
萬曆 7년 기묘 族後孫 東岡 金宇?이 지었다.
良昭公이 太宗朝 靖亂佐命功臣으로, 宗社가 태평하기를 기다려 사직소를 올리고 孟洞의 산수 사이에 소요하였다. 죽은 뒤 세종대왕이 특별히 加資하여 諡號를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하면서 화상을 본가에 보내어 모시게 한 내력을 소상히 적었다.
「墓碣文」 4
嘉靖 9년 경인 族後孫 金正國이 지었다.
공의 휘는 英烈 字 烈之 本貫 義城, 洪武 3年 戊戌 義城에서 태어났다. 나이 겨우 학업에 뜻을 둘 정도에 石灘 李存吾 선생과 冶隱 吉再 선생이 만나보고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太祖 龍興 3년 갑술년 蒲輪을 보내어 징소하매 사양하다가 아버지 府院君이 신신 당부하므로 입조하였다. 이듬해 등과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무인년 병조참판으로 禍亂에 공을 이루었으므로, 태종 경진년 靖亂佐命功臣으로 책훈되고 義城君에 봉읍되었다.
갑신년 祝天盟會에 참석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長湍縣 孟洞으로 퇴거했다. 이로써 자호하기를 孟巖이라 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여러 번 징소에도 자신의 뜻을 지켰는데, 이 때 ‘내가 배움이 미숙한 때 일찍 벼슬을 살았다. 지금 벼슬은 이미 높이 하였으니, 다시 학업에 힘씀으로써 길을 잃고 혼미한 지경에 빠지는 것을 면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했다.
永樂 신축년 졸, 향년 52, 묘는 장단에 있다.
세종대왕이 특별히 우의정을 증직하고 ‘良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行狀」 7
가정 19년 경자 沈連源이 지었다. 내용은 묘갈문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대대로 麗朝의 녹을 먹던 望族으로 나라가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조정에 서게 되는 심리적 갈등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즉 아버지 부원군(휘 紘)이 출사를 권하면서
“참 군주가 왕좌에 있으면 궁벽한 처지에 있던 선비들이 모두 출사하여 입신양명을 하는 것이니,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眞主在上 巖穴之士皆出 立身揚名 此其秋也)”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도가 있는 세상에서 선비로서 가난하고 천한 것을 진실로 군자가 부끄러워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 집안은 累世 士夫家로 고려조의 은택이 깊습니다. 이제 나라가 혁파된 지가 오래지만 여조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새 조정에 서는 것은 인정과 도리가 아닐 듯 합니다. 이런데도 임금을 섬긴다면 충성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當此有道之世 士之貧且賤焉者 誠爲君子所恥 而但吾家世世享茅土 麗朝恩澤 深矣 今革命未久 忘麗恩附新朝 恐非人情道理 如是而事君 亦何效忠)”라고 하였다. 이에 부원군이 다시
“선대의 일로써 말한다면 지금 벼슬에 나아간 이로 누가 고려조의 은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오직 이는 천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하늘이 명한 바가 있다면 무슨 인정과 도리에 어긋날 것이 있겠는가? (以先世言 當今仕進 孰無麗朝恩澤 惟是天命 所歸而已 天之所命有 何人情道理之所失耶)”라고 하므로, 공이
“임금이 부르고 아버지가 권하신다. 임금과 아버지의 명을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君召之 父勸之 君父之命 安敢不聽)”라 하고 마침내 직임에 나아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事實」 11
遜齋 朴光一이 지었다. 묘갈문과 행장에 다 있는 내용이다.
「鶴林祠禮成祝文」 13
‘失傳’이라고 밝혔다.
「丁享祝文」 13
학림사에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할 당시의 축문으로 추정된다.
「麥井祠奉安祭文」 13
遜齋 朴光一이 지었다. 良昭公 金英烈의 위패를 영당에 함께 봉안하여 향사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제문이다. 양소공이 여러번 징소에도 응하지 않으므로, 태종이 공을 그리워하여 화상을 그려 흠모의 정을 표시한 바 있었는데, 공이 돌아가자 세종이 화상을 자손가에 돌려보내어 영당을 지어서 봉안케 하였다. 이 때 영당의 명칭이 ‘麥洞影堂’이었다.
이 제문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당시에 사당까지 함께 짓지 못하여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지 못한 채 세월이 많이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을 모시는 정성까지 희미해질 것을 우려한 사림에서 논의가 일어나 자손들이 화상을 모신 영당에 위패를 봉안하여 함께 모시고, 묘호를 ‘麥井祠’라고 개칭했다는 내용이다.
다음에는 諸賢들의 次韻詩와 서신, 通訓大夫行慶山縣令 李彙載가 丙午年에 쓴 회맹록후서「會盟錄後?」, 족후손 척암 김도화가 쓴 와곡영당중수기「臥谷影堂重修記」, 양소공 21세손 金洛卿이 지은 「追遠契序」, 旁後孫 通政大夫前行弘文館侍講秘書監郞兼知制誥金鴻洛이 지은 「丹書閣上梁文」, 傍?孫 金正模가 지은「新川書院記」, 宗後? 金周悳이 지은「新川書院奉安文」, 傍後孫 金景植이 지은「講堂上梁文」, 族後孫 金周悳이 지은 「立敎堂記」, 後孫 世躍과 族後孫 應煥과 黃州 邊時淵이 각각 지은 跋文이 있다.
諸賢次韻에는 양소공의 시에 차운한 趙相國 溫, 李容軒 原, 沈參判 龜齡, 李代言 膺, 成獨谷 石?, 韓信齋 尙敬, 李亨齋 稷, 金相國 承?의 「차맹동초당시(次孟洞草堂詩)」가 있다. 원운 「맹동초당(孟洞草堂)」은 오언율시가 한 수이고 칠언율시 가 두 수이다. 서신은 趙相國 英茂, 이찬성 숙번, 권양촌 근의「여맹암김참판서(與孟巖金參判書)」가 각각 한 편 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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