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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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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신단의 중국 사행길 

12월 말에 중국 북경에 도착한 조선 사신단은 약 두달을 머물렀다가 이듬해 3월 초 귀국길에 올랐다. 북경을 떠나면 곧 계주였다. 계주에서 동쪽으로 30리를 가면 ‘송가성’(宋家城)이란 곳이 있었다. 1766년 3월1일 귀국길에 오른 홍대용은 이틀 뒤 북경으로 가던 길에 들르지 못했던 송가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런데 사신단의 부사(副使) 김선행은 동행을 거부했다. 이유는 송씨 가문과 청의 관계를 오해한 데 있었다. 김선행은 송씨 가문이 과거 청(淸)에 저항하였고, 현재도 청의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해의 구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송씨들은 명나라의 세신(世臣)으로 청의 군대를 여러차례 패배시켰고, 강희제 때 비로소 항복했다. 청은 송씨들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성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너무 견고해 실패한다. 또 청은 송씨들을 괴롭히기 위해 1년에 은 1만냥을 벌금으로 바치게 했지만, 송씨들은 아직도 버티며 청의 조정에 벼슬하지 않는다. 송씨들은 조선이 명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청에 복종하고 있기에 조선을 의롭지 않게 여기고 있고, 또 이런 이유로 조선 사람을 경멸한 나머지 침을 뱉는가 하면 불과 물을 달라 해도 주지 않는다. 요컨대 조선 사신단이 송가성을 찾아가면 모욕을 당하리라는 것이 동행을 거부했던 이유였다. 홍대용은 1713년 김창업이 찾아가 확인한 결과, 송가성의 전설은 사실이 아니었고, 만약 또 송씨들이 청에 저항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면, 더욱더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김선행은 듣지 않았다.

 

김선행을 남겨두고 홍대용은 3월4일 송가성을 찾아가 주인 송씨와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홍대용이 청조 이후 송가 사람들이 출사(出仕)하고 있는지를 묻자, 송씨는 자신이 진사가 된 지 9년이 되었지만, 아직 벼슬을 못 하고 있다고 답했다. 홍대용은 송씨들이 청나라 조정에 벼슬하지 않는다는 김선행의 말은 ‘모두 헛소문인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어 송가성의 역사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사가(私家)에서 어찌 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조(前朝, 명나라) 때 변방 방어가 매우 급했기 때문에 금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찌해서 유독 존가에서만 이 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도지휘사가 2만 장정을 거느리고 둔전(屯田)을 경작했는데, 이 역시 나라의 일이라 겸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남은 재화가 있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었겠습니까?”

 

“본조의 초년에 이 성 역시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언제 귀복(歸復)했는지요?”

 

“순치 3년(1646)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었는데, 그때 귀복했습니다.”

 

‘순치 3년 천하가 크게 평정되었을 때’란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한 뒤 일시 성립했던 남명(南明)의 여러 정부 중 복건성을 근거지로 삼았던 당왕(唐王)이 청에게 패배해 죽은 해다. 송씨는 이것을 청의 중국 지배가 확립된 해로 보았던 것이다. 어쨌든 송가성은 스스로 항복했던 것이고, 저항한 역사도 없었던 것이다.

 

홍대용이 송가성이 파괴된 곳이 많은 것이 과거 청군의 포격 때문인지 묻자, 옹정 연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물력이 부족해서 수리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벌금 ‘1만냥’도 사실이 아니었다. 송가성에는 특별한 저항의 역사도, 핍박의 자취도 없었다. 홍대용의 숙부 홍억이 송씨 가문에서 청조에 들어와 벼슬한 사람이 있는가를 묻자, “전조 때는 여러 대 세습했지만, 지금은 계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주(聖主, 청의 황제)에게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선행이 상상했던 것처럼 송가성의 송씨들에게는 저항의 역사와 의지가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가성의 저항이란 조선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였던 것이다.

 

50여년 전 김창업이 송가성의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김선행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송가성의 저항사(抵抗史)를 믿고 있었고 송씨들은 지금까지도 청의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은 절정기를 맞이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작은 성 하나의 저항이라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했다. 직접 찾아가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김선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실에 눈을 감고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언젠가 북벌(北伐)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껄이던 조선의 지배 계급은,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송가성을 찾아가자고 했던 홍대용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역시 멸망한 명(明)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하고, 오랑캐에 대해 언젠가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북경에서 청의 관리들이 자신을 눈여겨보면, 만주식으로 바꾸지 않은 자신의 옷을 보고 명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역시 일방적인 착각일 뿐이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 지배계급의 중국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었다. 실재하는 청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중국을 대상으로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했을까? 요즘 말로, 그것이 국익에 보탬이 되었을 것인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오늘날 대한민국 일각에서 내뱉는, 중국을 혐오하는 발언도 같다. 제발 꿈에서 깨시라.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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