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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EJOUNG!------참의공파 先系 이야기(한진휘 論)

남원.안산.공주 문중2

관리자 2025.03.23 20:46 조회 수 : 36

1649년 인조 27년 6월 己丑年 강진현감 6월에 도임하여 1650년(경인) 10월에 체직되어 돌아갔다. <금릉읍지>(1793)기록이다. 가장 오래된 돌다리 기록, 강진 작천 석교 신창비 강진 현감 한진 재임 때에 작천 석교비를 세웠고 시주인명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작천”은 현재 강진군 작천면(鵲川面)의 행정지명.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경홍은 나에게 인가(姻家)가 되어서 법에 따라 해임되어 돌아왔다. 경홍이 본래 몸이 여위고 질병이 많은 데다 1년 전에 또 아들을 잃고 너무 슬퍼하여서 양양 부사로 나간 것은 아마 질병을 요양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임하고 나서 질병이 더 악화되어 관직에서 해임되어 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마에 실려서 서울의 의원에게 돌아오던 중 대관령을 넘어 인제(麟蹄)에서 쉬다가 그만 죽으니, 바로 기해년(己亥年, 1659 년 현종 10년) 6월 2일이었다. 그의 형 한황(韓縨)이 혼자서 운구(運柩)를 하여 돌아가는데, 감영(監營)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내가 나가서 조곡(弔哭)을 하여 보 냄과 동시에 배를 마련하여 주어 광릉(廣陵)으로 내려보내어서 그해 9월 12일에 해천(蟹川) 경좌 신향(庚坐申向)의 터에 안장하였으니, 선영(先塋)을 따라 간 것 이다. 한태동(韓泰東)과 한두동(韓斗東)은 그의 두 아들이다. ◾韓 緗(한상)1614년 광해 6년 2월 9일 甲寅生~壬戌卒1682년 현종8년 [생원]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위(33/100) 韓撝謙의 仨子 태어나다. 叅奉을지냄. ◾韓泰東(한태동) 1646년丙戌生(인조 24년10월24일)~1687년丁卯卒(숙종13년10월 2일)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享年42歲 卒하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노첨(魯瞻)호는 시와(是窩)이다. 아버지는 장령 한진(韓縝)이다. 청주한씨의 공주 입향조(入鄕祖)이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한지(韓祉)[1675년 숙종 1년 乙卯生~1720년 庚子卒 숙종46년]가 아들이다. 1682년(숙종 8) 장령과 집의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서인의 김익훈(金益勳)과 김석주(金錫胄) 등이 남인의 발본색원을 위하여 남인역모설을 조작하였을 때 조지 겸(趙持謙) 등 소장파와 함께 그들의 흉계를 폭로하고 처형을 주장하였다가 이듬해 파직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은 김익훈 등을 옹호하는 노장파 중심의 노론 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는 소장파 중심의 소론으로 나뉘었다. 한태동은 1684년(숙종 10) 집의로 복직되었는데, 정직하고 신실하며 준엄(峻嚴)한 성품으로 파 직과 복직을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685년(숙종 11)부터 부수찬·헌납·부교리를 지냈고, 1687년 사간이 되었다. 한태동의 장인인 영일정씨 정영한(鄭榮漢)이 공산현감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처가로 인하여 공주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韓 祉(한지)1675년 숙종 1년 乙卯生~1720년 庚子卒 숙종46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석보(錫甫), 호는 월악(月嶽). 한위겸(韓撝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진(韓縝)이고, 아버지는 집의 한태동(韓泰東)이며, 어머니는 정영 한(鄭英漢)의 딸이다. 공주 출신으로 1699년(숙종 25) 생원시에 합격, 1705년 참봉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07년 정언·지평·수찬이 되었다. 1713년 동지사(冬至使) 조태채(趙泰采)의 일행으로 김상직(金相稷)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4년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7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720년(경종 즉위년)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1727년(영조 3)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팔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청렴결백한 성품이었으며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월악서소(月嶽書疏)』가 있다. 韓祉爲郡守ㆍ監司,常曰:“天下事,非一人所可爲也。” 每爲文牒草成,必歷示幕裨ㆍ鄕丞,以至軍官,僉曰可用,然後用之 牧民心書 茶山筆談 한지(韓祉)가 군수나 감사로 있을 적에 항상 말하기를,“천하의 일은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다.”하고, 매양 문서를 만들 때 초안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막료들이나 향승(鄕丞) 그리고 군관까지 두루 보여서 그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 썼다. 守全羅道觀察使 吏曹叅判 贈職 공주 용성산 丑坐- 22 ◾韓德弼(한덕필)1696년 숙종 22년 1월 20일丙子生~ 1771년 영조47년 辛卯卒 父親韓祉 配:連山徐氏사이에 張子로 태어나다. 성주 지역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현감 한덕필(韓德弼)이 마을에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정성을 보였다는 인물 행적담이다. 조선 영조 대왕 시절에 심한 가뭄이 와서 백성들의 고충이 컸다. 성주 지역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현감 한덕필은 하늘에 대한 정성과 덕이 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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