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문중
◉한충상(韓忠常) 1444년出生推定 ■세조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5월 16일(을해) 4번째기사 장귀동이 살인한 것을 용서하게 하다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승지(承旨) 등을 불러 정사를 보았다. 부장(部長) 한충상(韓忠常)이 일찍이 정병(正兵) 장귀동(張貴同)·안원(安元)·전원(全元) 등을 거느리고 성(城) 밖에서 도적을 잡았었는데, 장귀동 등이 결성 경저리(結城京邸吏)8407) 노생(魯生)의 아내를 타살(打殺)하였으므로,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장귀동은 율(律)이 교형(絞刑)에, 한충상 등은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해당합니다.”하니, 임금이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 게 이르기를, “사람을 치사(致死)케 한 것이 이와 같이 쉽게 응해질 수가 없다. 당초에 한성부(漢城府)는 얼어 죽은 시체를 검시(檢視)함에 자상하지 못 한 때문이고, 이제는 일월이 이미 오래되어 또한 자상하게 분별하기가 어려운데, 또 사유(赦宥)를 경과하였으니 아울러 모두 용서하게 하라.”하였다.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御序賢亭, 召承旨等視事。 部將韓忠常, 嘗率正兵張貴同、安元、全元等, 捕盜於城外, 貴同等打殺結城京邸吏魯生之妻。 刑曹啓曰: “貴同律應絞, 忠常等 杖一百流三千里。”上謂同副承旨韓繼純曰: “人之致死, 不應若是易也。 當初漢城府, 因屍凍, 檢視不詳, 今則日月已久, 亦難詳辨, 又經赦宥, 竝皆原之。”
[註 8407]경저리(結城京邸吏) : 고려와 조선조 때 지방 관청과 중앙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게 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서울에 파견하던 향리(鄕吏). 첨절제사 한충상의 사위 禮川郡守李克昌 묘표에는 관직이 典簿( 종친부에 두었던 종5품직. 정원은 1명으로 조관(朝官)이었다)로 기록되어있다
◾표해록(漂海錄) 제3권에 한충상(韓忠常) 선조님 행적 무신년(1488, 성종 19) 4월27일- 26 조선 성종 19년(1488)에 최부(崔漙)가 지은 수기(手記). 제주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하여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왕명에 따라 기록하였다.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사신(謝恩使臣)을 만났음. 이날은 흐리고 밤에는 큰비가 내렸습니다. 어양역은 계주성(薊州城) 남쪽 5리 가량에 있었습니다. “우리 본국 사신이 곧 온다지요. 만약 노상에서 서로 만난다면 한번 읍(揖)만 해도 좋으니, 나는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본국 고향 소식을 알고 싶소.” 하니, 장술조는 말하기를,“좋습니다.”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오후 4시 전후)경에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叅議公韓磌壻), 서장관(書狀 官) 윤장(尹璋)과 최자준(崔自俊)ㆍ우웅(禹雄)ㆍ성중온(成仲溫忠仁壻)ㆍ김맹경(金孟敬)ㆍ장우기(張佑奇)ㆍ한충상(韓忠常忠仁弟)ㆍ한근(韓謹忠仁二子)ㆍ오근위 (吳近位)ㆍ김경희(金敬煕)ㆍ권희지(權煕止)ㆍ성후생(成後生)ㆍ이의산(李義山)ㆍ박선(朴璇)ㆍ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漁陽驛) 안에 우거하였으므로,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마당 가운데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또한 고개를 숙이고 신에게 말하기를...... 세종29년 (1447년)에 한충상 나이는 약 3 세~6세정도로 추정. 세조14년에는 나이가 대략24세로 추정되고 중국에 가셨을때 나이는 대략 44세로 추정. (세종26년, 갑자년(甲子年), 1444년)生 韓忠常의 伯父는 양절공 韓確이며,韓確의 丈人 洪汝方인데 配位가 東萊鄭氏이고, 鄭昌孫과는 同腹남매인데, 정창손의 子 鄭价이고 홍여방은 姑母夫가 된다. 洪瑞從의 첫째사위 鄭价 이고. 둘째사위 韓忠常 ※한충상- 丈人 洪瑞從 남양홍씨 系譜 高祖 홍언박(門下侍中 .남양후). 曾祖 홍사우(密直司使.全羅巡撫使).祖 홍이(全羅道觀察使). 父 洪仁老(예빈少尹). 이다. 洪瑞從(郡事)*譜冊에는 홍서종을 都事 瑞로 되어있어 바로 잡는다. *홍이의 아우 홍륜은 자제위로서 공민왕 시해사건에 주역, *남양부원군 좌의정 홍달손은 洪瑞從의 親四寸 洪治從(府使)의 子이고. *홍서종의 첫째 사위 鄭价는 영의정 鄭昌孫 子이며, 둘째 사위는 한충상 恭愍王 시역사건에 관여한 洪倫과 洪寬은 사촌간으로 文正公 彦博의 손자들이다. 홍윤는 아버지 師禹(文正公 셋쩨아들)와 兄 彛(이) 도 함께 홍관은 아버지 師普(文正公 큰아들)와 동생 憲도 함께 모두 處刑되어 禍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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