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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건----13대조 한전의 사위

관리자 2023.10.02 09:03 조회 수 : 7

성건----13대조 한전의 사위

 

공의 휘(諱)는 건(健)이요 자(字)는 자강(自强)이며 시호는 문혜(文惠)이니, 창녕인(昌寧人)이다. 예조 판서 정평공(靖平公) 휘 석연(石珚)은 증조이고 지중추원사 공도공(恭度公) 휘 엄(揜)은 조부이며, 형조 참판 휘 순조(順祖)는 아버지이다.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도조 대왕(度祖大王, 태조의 조부)의 현손녀(玄孫女)로서 내외간에 덕이 합쳐지니 남다른 아들을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공에게는 두 형이 있어 성숙(成俶)과 성준(成俊)이니 모두 그 시대의 명재상(名宰相)이다. 공은 천순(天順)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8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화(成化)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재주가 온전하기 때문에 두루 벼슬을 거쳤고 기국(器局)이 컸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전적(典籍)과 직강(直講)이 되어 제생(諸生)들의 모범이 되었고, 사복시(司僕寺)의 판관(判官)과 부정(副正)에 선발 보임되자 모두가 말하기를, “복신(僕臣)이 올바르게 들어왔다.”고 하였으며, 홍문관에서 이끌어 경륜할 때는 화려한 문장의 빛남이 있었고 경연(經筵)에 시강할 때는 논사(論思)와 규간(規諫)의 도움됨이 많았으며, 사헌부에 출입하여서는 지평ㆍ장령ㆍ집의ㆍ대사헌이 모두 거쳤던 자리로서 조정의 기강이 바로잡혔고 승정원에 들어가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이르도록 승전(承傳)을 맡은 지 오랫동안 주달을 엄명하게 하였다. 외직에 나가서 경기 관찰사가 되어서는 사리에 어두워 공이 없는 자는 물리치고 현명하여 공적이 있는 자를 등용하는 법을 거행하였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병조ㆍ예조의 참판과 이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성종께서 가장 권우(眷遇)하였다.

임금께서 동궁에 있을 때에는 공이 좌우 빈객(左右賓客)이 되어 보익(補益)한 바가 많았으므로 조정 공론은 공이 곧 정승이 되리라고 여겼으나 세상을 걱정하느라고 일찍 노쇠하자 친우들이 마음속으로 애석히 여겼다. 홍치(弘治) 7년(1494년 성종 25년) 겨울에 성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니 공은 병을 무릅쓰고 곡림(哭臨)하였으나 슬픔과 병환이 더하여 반열에는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홍치 8년(1495년 연산군 원년) 2월 모일에 자택에서 졸(卒)하니, 향년 58세이다. 공은 효우(孝友) 충신(忠信)하고 관유(寬裕) 정대(正大)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대인 군자(大人君子)’란 것이 공을 두고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와 가정에서 백성과 사람에게 적의(適宜)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복을 받음이 컸어야 마땅하였건만, 벼슬은 여기에서 그치고 수명 또한 여기에서 그쳤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호조 참의 한전(韓磌)의 따님을 취(娶)하였는데,

역시 현부인(賢夫人)으로서 정히 이른바 ‘양미(兩美)가 합취하였다’고 할 것이나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천도(天道)를 알 수 있다 할 것인가? 뒤에 둘째 형의 아들 성경온(成景溫)으로 상제(喪祭)를 받들게 하여 예를 다하였고, 3월 20일 계유(癸酉)에 양주(楊州) 치소 남쪽 도봉산(道峰山)의 남쪽인 해촌리(海村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이듬해 가을에 공의 계후자(系後子)가 나를 찾아와 묘비문을 부탁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공의 평생우(平生友)라 할 수 있으므로 나는 사실 공을 안다 할 것이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 이에 간략히 그 사행(事行)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의 문사(文詞)를 쓴다.

 

선천적인 그 기국과 확고한 그 지조에 덕(德)까지 갖추었네. 헌칠한 키와 엄연(儼然)한 인망에 위의(威儀)도 장엄했네. 정대(正大) 관평(寬平)하게 경중(輕重)을 헤아려 처리하였으니 나라의 주석(柱石)이었네. 임금의 두터운 권우(眷遇)와 여러 사람들의 융성한 평판으로 의정(議政)에 오르기가 눈앞에 있었는데, 나라 걱정에 일찍 늙고 임금 곡하느라 슬픔 지나쳐 동량(棟樑)이 갑자기 꺾이었네. 공명(功名)과 사업은 슬픔 속에 붙여 두고 이 무덤 쌓아 올렸는데, 나는 돌에 명을 새기어 이 산 기슭에 세워 그 명성과 자취 길이 보전하네.               

 

                             성건 묘지명-----홍귀달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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