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의 시고에서
合坐寶源庫 庫故政丞 韓渥故宅
先王所嘗御而穡初拜密直處也復來合坐於此有感于懷吟成一首
邊報頻動海隅 歲란臣拜鴻樞 堂時氣焰壓諸者 今日官階無大夫
再任政堂非獨我 復來縫掖惑猶吾 鼎湖龍去烏號墜 誰識乾坤一腐儒
보원고에서 합좌하다,고는 옛정승
한악공의 옛집으로 선왕이 일찍이
이곳에 거동하시고 목은 이색이 처음 밀직에 제배된
곳인데 이제 열일곱해가 된다. 이 곳에 다시와서 합좌
하니 마음에 느낌이 있어 이 시를 지은다.
이어지는 변보가 바닷가를 흔들때에
한해가 다 하려는데 臣색이 홍추에 제배되었네.
당시에는 기염이 여러사람을 눌렀는데
오늘날에는 관계에 大夫가 없네.
두번 임용된 정당이 나 혼자가 아니지만
뒤에 오는 봉액으로 혹시 나와 같은 이가 있으랴?
정오에서 용이 승천하자 오호만 떨어지니 누가 알랴?
하늘과 땅사이에 한썩은 선비가 있는줄을!
韓 渥小記
고려사에는 공의품성은 謹愼하고 器局은 高邁하며 每事를 必히 세번思考힌 후에 行하였고 몽고.한어에 通解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誌石에는 號를 적선문(積善門)이라하고 천성이 온아정민(溫雅精敏)하며 人道의 교훈에 감염(感染)되어 유학의 교풍이 있으며 官職에 있어서의 處事는 안상(安祥)하고 근신하여 모나거나 불화가 없이 좋은 계책를 모색하여 원만이 처리하였다.
(思肅公 韓 渥 : 원종 15년(1274)~충혜왕 3년(1342) 9世)
공은 고려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왕조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악(渥)이요 자(字)는 자포(子布)요 호(號)는 성재(誠齋)또는 적선문(積善門 : 門下生이 지어준 號)이다.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사기(謝奇)의 아들이요 첨의중찬(僉議中贊)문혜공(文惠公) 강(康)의 손자이다. 公은 고려 원종(元宗) 15년(1274)에 탄생한 명문 출신으로 몇년 있다가 충렬왕(忠烈王) 5년(1279) 3월에 독로화(禿魯花 : 두루아치란 蒙古語로 元來 人質로 고려에서는 人質로 간 王子와 高官의 子弟를 가리켰다)로 부(父) 사기(謝奇)가 뽑혀 원에 가족을 거느리고 대방공(帶方公) 징(徵)을 따라가는데 아들 악(渥)과 영(泳), 준(浚)을 데리고 갔다.
여러 해 머물다 영(泳)만을 천자(天子)가 거주하는 경사(京師)에 맡겨놓고 가족이 환국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현관(顯官)을 역임(歷任)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 9월에 우대언(右代言)이 되고 밀직사 좌승지(密直司 左承旨)를 거쳐 충숙왕(忠肅王) 7년(1320) 12월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월 지밀직사자(知密直司事)로 삼고 4월 왕이 원나라에 가는데 사경(四更 : 새벽 2시경)에 양선문(陽善門)으로 나갔으므로 조정의 관원들은 전송 못하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오 잠(吳 潛)과 公 등 대신만 몇 데리고 갔다. 당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왕(瀋王) 고(暠)가 분수밖의 욕망으로 허위로 여러 가지 트집을 꾸며 괴롭히므로 公이 그 장소에 꼭 지켜서서 일행(一行)을 안심케 하고 동행대신(同行大臣)들과 함께 성심성의(誠心誠意)로 보호하고 기발(奇拔)한 계략(計略)으로 왕에 미치는 위급한 화난(禍難)을 막아냈다.
원나라에서 돌아와 10월 公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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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鐵券 : 天子가 功臣에게 주는 割付의 一種)에 기록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으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封)하고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에 서훈(敍勳)되었다. 충혜왕 즉위년(忠惠王 卽位年 1330) 4월 삼사사(三司使)로 삼았으며 이듬 해 중찬 (中贊)으로 삼았다.
충숙왕 복위 8년(1339) 왕위(王位)의 계서(繼序)가 있을 때 또 다시 간모배(奸媒輩)의 소란(騷亂)이 있었으므로 公은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중신(衆臣)들을 거느리고 계략(計略)을 책정(策定)하여 국난(國難)을 극복(克服)하였으며
충혜왕 복위 1년(1340) 4월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에 올랐다.
公은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고 만년(晩年)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私邸)에서 동왕 3년(1342) 69세로 졸하니
시호(諡號)를 사숙(思肅)이라 하였으며
충목왕(忠穆王) 2년(1346) 5월 대행왕(大行王)을 대묘(大廟)에 부제(부祭)하고
정승(政丞)인 公과 참리(參理) 이규(李揆)를 배향(配享)하였다.
천성(天性)이 근엄(謹嚴)하고 신중(愼重)하며 대인(大人)으로서의 기량(器量)이 있어 매사를 반드시 세번 생각하여본 연후(然後)에야 시행(施行)하였고
몽고어(蒙古語), 한어(漢語)에도 능통(能通)하였고 시(詩)에도 능(能)하였다.
배위(配位)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卞韓國大夫人 原州 元氏)는 밀직사사 경(密直司事 卿)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송씨(宋氏)는 정윤(正尹)의 따님이다.
아들은 일곱인데 첨의공 대순(僉議公 大淳),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 계성군 중례(繼城君 仲禮),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 서원군 방신(西原君 方信),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이다.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 공묘(公墓)에 옛 비석(碑石)이 있었으나 모두 자획(字劃)이 훼손되었으므로
순조(純祖) 8년(1808) 8월 후손(後孫) 이조판서 만유(吏曹判書 晩裕)가 짓고 좌의정 용구(左議政 用龜) 서(書)로 개수(改竪)하기에 이르렀는데 명(銘)에 이르기를
「위대(偉大)하신 사숙공(思肅公)은 고려조(高麗朝)의 명신(名臣)일쎄. 이 세상(世上)을 다스리어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하오. 연경(燕京)의 사지(死地)에서 왕(王)의 화(禍)를 막아내니 범의 꼬리 밟고 넘어 인각(麟閣)에 공(功) 세웠네. 님을 위(爲)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거듭거듭 수훈(殊勳)일쎄. 군국(君國)에는 진충(盡忠)하고 만민(萬民)에게 시혜(施惠)로다. 남긴 풍도(風度) 오래건만 아직까지 새로워라. 성녀(聖女)도 탄육(誕育)하고 현량재상(賢良宰相) 많이 낳네. 의연(依然)한 저 묘소(墓所)는 오백년(五百年)이 되었는데 빗돌에 글을 새겨 천년만년(千年萬年) 전(傳)하리라」하였다.
公은 충혜왕 3년(1342) 69세로 졸하니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 유좌묘향(酉坐卯向)에 배위, 변한국대부인원주원씨(配位卞韓國大夫人原州元氏)와 후배, 송씨(後配宋氏)의 삼합조(三合兆)로 안장되었다.
자손들이 늘 봉사(奉祀)하여 왔으나 1950년 6·25전란으로 휴전선 완충지대(休戰線 緩衝地帶)에 놓이게 되니 성묘(省墓)길이 막혀 1988년 이곳 고양시 내유동 대내산하(高陽市 奈遊洞 大奈山下)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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