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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명 선덕제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조선에 끼친 영향

 

한 희 숙  論文

 

 

본 논문은 조선 초기 명나라에 공녀로 뽑혀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 던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가 공녀로 선발된 이유와 가세의 성장, 명황실 내에서의 위상, 그리고 그녀가 조선왕실에 끼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한씨는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의 여동생으로,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 대비의 고모이다. 한씨의 이름은 계란으로 태종 10년(1410)에 한영정과 의 성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씨는 공녀 출신이었던 언니 여비(麗妃)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점과 얼굴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세종 9년(1427) 5월에 공녀로 뽑혔으나 병이 나 이듬해에 명나라로 갔다. 그녀는 7년 동안 선덕제의 후궁으로 산 기간을 합쳐 57년 동안 명황실의 여성으로 살았다. 그 사이 토목의 변(土木之變)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어린 성화제를 돌보아준 ‘아보의 공’이 있어 성화제는 황제 즉위 후 한씨에게 지 극한 총애와 효도를 바쳤다. 한씨는 명황실 내의 사정에 밝아 ‘모사(姆師)’ ‘여사(女師)’ ‘노노(老老)’ 등으로 불렸다. 또한 한씨는 조선의 왕인 성종의 외척이었던 만큼 명황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종 14년 한씨가 죽자 성화제는 그녀를 ‘공신부인’으로 봉하였다.

한씨는 친정 가문의 성장과 조선왕실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첫째, 오빠 한확이 세종 및 수양대군(후의 세조)과 사돈을 맺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씨는 청주한씨 한확 가문이 왕실의 외척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명의 책봉을 받는 것과 조카사위인 의경세자의 책봉에 공을 세웠다. 셋째, 성종의 친부모 인 의경세자와 조카 수빈 한씨를 왕과 대비로 추숭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 다. 넷째, 조선이 명에서 금지한 궁각(弓角)무역을 허락받는데 도움을 주었 다. 다섯째, 명황제에게 성종의 부인 폐비 윤씨의 폐비 사실을 알리고, 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책봉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섯째,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에도 적극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의 대가로 한씨는 조선왕실에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씨에게 바치는 별진헌은 조선인 화자 출신 명사(明使) 정동이 황제와 한 씨를 등에 업고 한씨의 손발 역할을 하며 성종 8년 궁각무역문제에 개입하 면서 더욱 부담이 커졌다. 성종 9년에 바치기 시작한 별진헌은 처음에는 한씨의 족친이 한씨에게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지만 그 종류와 수량이 점점 늘어나고 점차 상공(常貢)이 되어 조정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성종 14 년에 한씨가 죽은 직후까지 바쳐졌던 별진헌은 조선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1.1. Ⅰ.  서  론

 

원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공녀는 명이 건국된 후 곧 재개 되어 영락제와 선덕제 년간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조선전기에 명나라에서는 모두 12차례에 걸쳐 조선의 처녀를 요구하였다. 이 가운데 명나라 황제의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고 실제로 처녀가 보내어진 것은 7차례였다. 조선이 명에 바친 공녀는 조 선 초 26년간 7차례 114명으로, 이 가운데 명황제의 후궁이 된 여성은 16명이었 다. 그리고 명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을 살며 조선에 가장 큰 영향 을 끼친 여성은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 한계란(韓桂蘭: 1410-1483)이었다.

공신부인은 조선 초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한확의 누이로서 소혜왕후 한 씨의 둘째 고모이자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고모할머니였다. 그녀는 태종 10년(1411) 4월 9일에 태어나 세종 10년(1428) 명나라에 공녀로 뽑혀가 선덕제의 후궁이 된 후 성종 14년(1483) 5월 18일에 7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57년1) 동안 정통제, 경태제, 성화제 등 4황제를 섬겼다. 공신부인이란 칭호는 한씨가 죽은 다음 해인 성종 15년(1484)에 성화제가 바친 시호이다.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명황실 에 살면서 명과 조선왕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 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아울러 조선에 많은 별공을 요구하여 큰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신부인 한씨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없다. 조선 초기 공녀와 그 친족의 정치적 성장과 대명외교활동에 대한 연구)에서 부분적으 로 다루어지고 있고, 왕실 세력으로 한확이나 소혜왕후의 생애를 살핀 논문), 그리고 조선 출신의 명나라 사신이나, 조선인 환관 출신 명사(明使) 정동의 역할 등을 고찰한 연구, 그리고 복식분야에서 공신부인 한씨에게 전달된 물품 및 출 토복식 분석을 통해 15세기 조선 사대부가의 여성복식을 고찰한 연구) 가운데에 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왔을 뿐이다. 이러한 연구들을 통해 공신부인 한씨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으로 파악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먼저 공신부인 한씨의 출신과 공녀로 선발되어 명황실로 들어가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명황실 내에서의 그녀의 위상을 고찰한 뒤, 마지막으로 그녀가 조선왕실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공녀로서의 그녀의 삶과 조선 초기 국내 상황과 명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조선 초기 공녀들의 위상과 조명관계에서의 그녀 들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볼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1. 공녀 간택과 청주 한씨 가세

 

공신부인 한씨는 성종의 외할아버지 한확의 누이로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의 고모이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녀의 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인 한씨는 성은 한(韓)이요 휘(諱)는 계란(桂蘭)인데, 대대로 조선국 재상의 집안이다. 아버지의 휘는 영정( 永 矴 )이요 어머니는 김씨인데, 영락 경인년 4월 9 일에 부인이 났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한씨는 태종 10년(1410) 4월 9일에 한영정과 의성김씨 사 이의 3남 2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공신부인 한씨를 대대로 조선국 재상 집안 출신이라 하였다. 이에 한씨의 출신가계에 대해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표 1> 공신부인 한씨의 출신 가계도

 

 

永矴--------------1녀(麗妃)

 

永矴 -------------(1男) 確

治仁.治義.治禮

 

 

永矴-------------(2男) 磌

忠仁. 忠義. 忠禮. 忠知 忠信 忠常 忠順

 

永矴--------------2녀(恭愼夫人)

 

永矴-------------- (三男)질

致元.致亨.致良.致美

 

출처: 청주한씨 양절공파 족보 및 국조인물고 成宗實錄 등 참고

 

사실 고려말 조선 건국 초의 공신부인 한씨의 가문은 재상가문이 아니었다. 공신부인의 아버지 한영정은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생몰이 불분명하며 그의 관력 또한 명확하지 않고, 다만 지순창군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고려말 한영정의 중부(仲父)인 한안(韓安)이 공민왕 시역(弑逆)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이 보낸 이영(李英)에게 죽임을 당한 일로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영정의 아버지 한녕(韓寧)은 아버지(한방신--수문전 태학사감춘추관사.첨의부 찬성사)및 형제들이 유배지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한영정 역시 출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영정은 두 딸이 명나라 공녀로 들어가 명황제의 후궁이 됨으로써 명황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아들 한확이 현달함으로써 참판, 판서, 찬성, 서성부원군에 추봉되 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 다. 비로소 재상 가문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한영정은 한확을 비롯하여 한전, 한질 등 3아들과 2녀를 두었다. 장녀 한씨는 먼저 명나라에 공녀로 들어가 영락제의 후궁이 된 강혜장숙여비이다. 여비 한씨 는 태종 17년(1417)에 3차 공녀로 3대 황제 영락제 성조에게 진헌된 여성이다. 태종 17년 4월에 통사 원민생(元閔生)이 북경에서 돌아와 황제가 미녀를 요구한 다고 전하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각도에 사람을 보내어 처녀를 골라 뽑게 하였다. 그 결과 한씨가 제1등으로, 황씨와 함께 선발되어 북경으로 출발하였 다. 이때 한씨의 동생인 부사정 한확, 황씨의 형부인 녹사(錄事) 김덕장(金德章), 근수(根隨)하는 시녀 각 6인, 화자(火者) 각 2인이 따랐다.

여비 한씨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였다고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한확도 명나라 벼슬인 광록소경(光祿少卿)에 임명되었고 또 한씨 집에 금·은·비단 등의 값 진 물건들을 내려 주었다.그런데 한씨와 함께 공녀로 간 황씨는 나중에 숫처녀 가 아닌 것이 들통이 나서 조선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 다. 이 일은 자칫하면 명과 조선 사이의 심각한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씨의 지혜로 무마되었다. 한씨는 명황제의 신뢰와 총애를 많이 받았고, 명황실 내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비록 후궁이라 하여도 황제의 총애 를 받으며 황제를 측근에서 모셨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과 권위를 빌릴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에 영락제 성조가 북정( 北 征 ) 길에 올라 타타르를 정벌하던 중에 죽었다. 따라서 여비도 명나라에 간 지 겨우 7년 만에 갑작스레 순장을 당하였다. 이후 여비에게는 봉작과 시호가 더해졌고, 어 진 행실로 표창 받았다. 한씨는 명나라에서 7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황제의 총애 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조선왕실과 친정인 청주 한씨 가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누이 덕분에 한확을 비롯한 족친들의 출세는 매우 빨라졌다.

영락제 성조가 죽은 이후 홍희제 인종이 즉위했으나 10여 개월 남짓 만에 죽었 다. 이어 황제가 된 인물은 선덕제 선종이었다. 선덕제 선종은 다시 한확의 누이 동생을 후궁으로 삼고 싶어 했다. 여비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과 아울러 한영정의 둘째 딸 얼굴이 아름답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공신 부인이 되는 한영정의 둘째 딸 한씨는 18살이 되는 세종 9년(1427) 5월에 공녀로 뽑혀 명나라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병이 나서 가지 못했다. 언니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 또한 자못 완강하였다.

처녀 한씨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 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에 따라 죽었으므로,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또 막

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아뢰었으므로, 와서 뽑아 가게 되었는데, 병이 나게 되어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 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하고, 칼로 제 침구 를 찢고 갈마 두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흩어 주니, 침구는 장래 시집갈 때 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이었다.

한씨는 공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끝까지 몸부림쳤지만 사신들의 집요한 요구 와 조정의 권유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빠 한확은 작은 누이가 공녀로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때 한씨는 병 때문에 다른 공녀들과 함께 명으로 가지 않았지만, 결국 이듬해인 세종 10년 10월에 명사신이 다시 파견되어 와 북경으로 데리고 갔다.

한씨가 공녀로 명나라에 갈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당시 도성 안 사람들과 사족녀 등 한씨의 행차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며 안타까워 하였다.

 

세 사신이 한씨를 모시고, 화자(火者) 정선(鄭善)·김안명(金安命)을 인솔하고서 해청(海靑) 1연(連), 석등잔석(石燈盞石) 10개를 가지고 돌아가니, 임금이 모화루 (慕華樓)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보내고, 진헌사(進獻使) 총제(摠制) 조종생(趙從生) 과 한씨의 오라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 한확이 함께 갔다. 도성 안 사람과 사 녀( 士 女 )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 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 나."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 生 送 葬 )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명에 가는 그녀를 산송장(生送葬)이라고 하였다. 순장은 조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고, 한씨가 또 언니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러나 공녀로 가 선덕제의 후궁이 된 한씨의 후광으로 오빠 한확을 비롯하여 족친들은 역시 출세의 길을 달렸다. 한확은 누이 여비로 인하여 명황제의 총애를 받아 조선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가졌으며, 나아가 여동생 한씨가 다시 명황제의 후궁이 되자 더욱 출세가 빨라졌다. 그는 세종․세조와 사돈이 되었으 며, 자신뿐만 아니라 청주 한씨 가문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한확은 남양 홍씨(홍여방(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 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6녀가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였다.

동생 한전(韓磌)도 누이의 힘을 입어 의영고승(義盈庫丞), 황해도 관찰사, 형조·호조·공조 참의 등을 지냈다. 그러나 세종 29년에 한확보다 일찍 죽었다. 또한 동생 한질(韓)은 누이가 공녀로 간 덕분에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에 임 명되었고 이어 한씨와 형 한확의 후광으로 녹사(錄事), 좌랑, 충청도도사 등을 거쳤다. 그러나 그 역시 한확보다 일찍 죽었다.

이들 3형제는 당시 모두 명황제의 후궁이 된 누이 한씨 덕분에 남들보다 빠른 출세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확과 공신부인의 조카들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성종대 외척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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