提學公 諱 謝奇 墓所(제학공 휘 사기 묘소)
公의 묘소는 光州邑 西쪽 素志面 棲鳳洞(현 광산구 서봉동)천등산(天登山=현魚登山)子坐이다. 임진왜란 후에 失護되어 산아래 주민 吳姓이 비갈(碑碣)을 깨 버리고 윤장(倫葬)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가 한정승 묘(韓正丞 墓)라는 이야기가 인근에 구전 (口傳)되어 옴을 단서로 순조3년癸亥(1803)에 후손 영의정 용구(用龜)가 해익(海益)등 종인을 현지에 보내고 光州 羅州(광주,나주) 양 군수에게 서신을 보내서 산 아래 주민들과 더불어 묘역 일대의 땅을 파고 믿을 만한 자취를 찾아 보았더니 묘아래에서 부서진 비석 한조각에 우리의 姓인 "韓"字가 분명하고 公의 諱字인 "謝(사)"字는 오른쪽 모서리의 "才"자는 깨여저 떨어지고 왼쪽 편에 "言"과 중간의 "身"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 그 아래에 "亞中"두 字가 분명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亞中大夫 諱 謝奇(아중대부 휘 사기)"라고 각자된 부분임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산아래 거주하는 태중(台重)이라는 사람을 산지기로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고 훗날에 다시 改封築(개봉축)하기로 하였다. 그 후 순조33년癸巳(1833)4월에 후손 思臣(사신),군수 洛轍(낙철)이 경향 각처에 통문을 발송하여 墓下에서 종회를 열고 묘소의 개봉축, 비석의 건립,재실과 위토의 설비등을 숙의하였으나 중론이 구구하여 뜻한 바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비분한 속에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광복후 戊子(1948)년에 후손 복리(福履), 진환(振煥),근섭(瑾燮)등 諸宗의 발의로 각처에서 후손들이 분연이 일어나 합심협력하여 다음해 己丑(1949)년에 봉분을 개축하고 비석을 세우고 위토를 매입하였으며 재실 봉강재(鳳崗齋)를 건축하고 매년 3월 3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奉行)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묘소는 광주 광산구 서봉동(棲鳳洞) 어등산(魚登山) 중봉상(中峰上) 자좌(子坐)이다.
提學公 諱 謝奇 神道碑銘 제학공 사기
朝請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神道碑銘幷序
維光州治西一舍强棲鳳洞魚登山下丑艮龍子坐午向巳破之原卽高麗朝請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謝奇衣舃攸藏壬燹後失其護世傳以謂韓政丞墓始 正廟辛亥後孫大臣用龜遣諸宗人囑光州羅州兩守宰發民丁搜信跡墓下得破碑一片姓韓字分明諱謝字言身完在才邊剝落又有爵秩亞中 字遂信之改修封塋而未及守護至純廟癸巳京鄕諸宗謀所以伐石表阡建閣置田衆論矛盾因循未果齊恨久矣幸玆往年癸巳宗議詢同飾墓竪表刱齋閣立庖庫置位田歲薦一祀之禮於是乎神理人情庶幾有伸而墓儀完備則準格據禮宜有神道大碑後孫基興상麗史列傳及家藏乘牒屬文於不侫曰是役也後孫在根全擔獻賢云謹叙其兆域顯晦之顚末繼撮世系履歷之梗槪而銘曰
광주읍 서편 30여리 지점인 서봉동(棲鳳洞) 어등산 (魚登山) 아래 축간용(丑艮龍)에 자좌오향(子坐午向)사파판국(巳破版局)인 자리가 바로 조정대부(朝請大夫)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고양현후(高陽縣候) 한공사기(韓公謝奇)의 묘소이다. 임진왜란 후에 실전(失傳) 되었으나,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 여기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 하므로 정조15년辛亥(1791)에 후손인 대신 용구(用龜)가 여러 종인들을 현지에 파견하고 나주, 광주 두 군수에게 군민 장정들을 징발하여 信蹟을 찾아 보도록 위촉하였더니 묘 아래에서 파손된 碑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姓자인 韓자는 분명하고 몇몇 글자는 깨어졌으나 존호중의 일부인 亞中이란 두자가 있어 이를 신뢰하고 봉분만은 즉시 수리하였으나 미처 수호 대책까지는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후 순조33년癸巳(1833)에 경향제종이 비석을 세울 것과 재실과 위토를 설치코자 상의하였으나 의론이 합치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었다. 다행히도 지나간 계사년(1953)에 각 종중의 의론이 통일되어 묘역을 미화하고 표석을 세우고 재각을 건립하며 산지기를 두고 위토를 마련하여 歲一祀를 행하게 되었으니 이제야 명명지중(冥冥之中)에 계신 영령께서 후손들의 영모지정(永慕之情)에 다소나마 마음 놓을 수 있게 되었으나 묘의(墓儀)를 완비코자 하면 마땅히 격에 맞는 신도대비(神道大碑)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 후손 기흥(基興)이 고려사열전과 家藏인 乘牒을 제시하면서 무능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는데, 이번 일은 후손 재근(在根)이 전체비용을 부담한 것이라 한다. 삼가 그 산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어렵게 찾게 된 전말을 기록하고 이어서 세계(世系) 내력의 개황을 요점만 따서 銘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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